음지에서 양지로...지능형 오야붕 '시노다 켄이치'

35년간 야마구치 구미(組)를 이끌던 전설적인 보스 다오카 카즈오가 1981년 68세를 일기로 사망하자 후계구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다오카는 죽기 전 잔인한 성격의 2인자 야마모토 겐이치를 후계자로 지명했다고 전해지지만 다오카 사망 당시에 투옥되어 있던 야마모토는 공식적인 취임이 불가능했다.

이에 따란 다오카의 아내였던 다오카 후미코가 상주를 담당했는데 남성 일색의 야쿠자 세계에서 상주라는 핵심적인 역할을 여성인 후미코가 담당함에 따라 당시에는 상당한 반향이 있었다.

1982년 출소한 야마모토 겐이치가 오야붕에 취임했지만 7개월만에 간경변증으로 사망, 결국 야마구치 구미는 분열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든다.

야마구치구미는 이전의 전통적인 야쿠자 조직들과는 달리 사카즈키라는 의식을 바탕으로 수많은 조직들이 느슨하게 연결되는 구조로 조직이 운영되고 있었는데 이는 야마구치구미가 급속도로 세력을 확장하는 근간이되기도했지만 다오카 카즈오라는 주도적 인물의 죽음 이후 필연적인 분열을 불러왔다.

다오카 카즈오의 사후 시점을 기준으로 야마구치구미는 구성원만 약 1만 3000여명에 공식 가입조직만 580여개, 일본 전체 47개 현 중 36개를 세력하에 두고 있었다. 다오카와 야마모토 사후 8명의 거대 조직의 두목들이 다오카 후미코와 함께 임시적으로 조직을 유지하고있었지만 최종적으로 다오카의 뒤를 잇는 오야붕이 필요했고 최종적으로는 2명의 후보가 남게된다.

한 사람은 조직의 2인자였던 야마모토 겐이치의 라이벌이었으며 조직의 큐슈진출에 지대한 공적을 남긴 야마모토 히로시였고, 또 한 사람은 다오카 및 야마모토 켄이치와 가까운 위치에서 공격적인 카리스마를 자랑한 다케나카 마사히사였다. 당시 평가로는 야마모토 히로시는 인텔리 야쿠자였으며, 다케나카 마사히사는 공갈, 폭행을 서슴치않는 전형적인 야쿠자였다고한다.

결국 최종적으로 다오카의 후임은 104명의 하위조직의 두목들의 투표에 의해 결정되기로 하였으며 57대 19로 후미코의 지지를 받던 다케나카 마사히사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이같은 경선결과에 불복한 야마모토 히로시가 그를 따르는 고위급 부두목 18명을 데리고 이치와회를 결성해 야마구치구미를 탈퇴하기에 이른다. 이때 이치와회가 데려간 조직원만해도 당시 야마구치구미의 조직원의 절반인 6000여명에 달했다고 알려진다.

이후 이치와회와 야마모토구미의 대립이 심화되었지만 돌아오는 모든 조직원들에게 사면령과 함께 퇴직수당을 제공 등 파격적인 대우를 제시해 이치와회의 조직원수를 3000명수준까지 줄이는데에 성공한다.

이치와회의 야마모토는 다케나카 사살하는데 성공하지만 이후 전국적인 규모의 유혈참극이 벌어진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다케나카 사후 이 두 조직간에서만 단 1년만에 약 200회 이상의 무장총격사태가 발생했다고한다.

조직원 수에서는 우위에 있었지만 살상무기에서 열세였던 야마구치 구미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무기 도입을 시도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미국 수사관들에 의해 다케나카의 동생이자 조직내 실권자인 다케나카 마사시와 조직의 재정담당자인 오다 히데오미를 체포된다. 체포 당시 이들은 하와이의 범죄조직들로부터 로켓 발사기 3문, 기관총 5정, 권총 100정, 외국인 암살자 1명을 고용하려했으며 이와 동시에 24kg의 암페타민과 헤로인 5.5kg을 판매하려했다고(당시 기준 133억엔이나 되는 양이었다.)한다.

결국 이 사건으로 야마구치구미는 이자와회와 무한정 대립을 하기보다는 생존을 위해 자중하는 방향으로 진로를 틀었고 결과적으로 야마구치구미가 이치와회와의 항쟁에서 상당한 주도력을 상실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러나 계속된 항쟁의 결과 수입원이 열악한 이치와회의 야마모토 히로시는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직접 야마구치구미 본부로 찾아가 사죄 및 은퇴하고 이치와회는 다시 야마구치구미에 합병되기에 이른다.

<사진=인터넷커뮤니티/사진합성=프레스맨 김승종 기자>

이후 항쟁에서 활약한 와타나베 요시노리가 5대에 취임한 후 은퇴하고 6대 보스 시노다 겐이치(篠田建市· 가명 츠카사 시노부)가 취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야마구치파는 일본 최대의 폭력단이다. 그렇다고 그들을 그저 유흥가에 기생하는 범죄자들 정도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美경제전문지 포천이 분석한 야마구치구미의 2014년 연매출 규모는 무려 800억달러로 한화 96조원에 달한다. 마피아를 비롯한 ‘세계 5대 범죄조직’ 중 세계 최대 규모다. 지난해 한국의 대표기업 가운데 야마구치구미의 연매출을 누를 수 있는 곳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다.

제조업 만큼은 아니지만 조직원수도 엄청나다. 일본 경찰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2012년 기준 야마구치파의 정조직원수는 1만3100명, 실질적으로 조직의 사업에 참여하는 준구성원의 숫자도 1만4600여명에 달한다. 합하면 2만7000명이 넘는 그야말로 대기업이다.

조직체계도 대기업과 비슷하다. 6대 보스인 시노다 겐이치 휘하에 7명의 샤테이(부두목), 79명의 와카나이(중간보스)가 각사업을 지역별로 관장한다. 히로시마와 오키나를 제외한 45개 도도부현에 사무소를 두고 있다.

다오카 카즈오가 야마구치구미의 터전을 마련했다면 세계적인 수준으로 성장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기여한 인물은 단연 6대 보스 시노다 겐이치다. 그는 전에 없던 지능형 두목으로 1980년대에는 부동산과 미술품 투자로 이익을 남기고, 1990년대 이후에는 부실 채권 정리사업 등에 뛰어 들어 막대한 부를 축척했다. 2000년대부터는 경제, IT 전문가와 손잡고 주가조작과 기업 합병 등을 통해 지능형 조폭으로 거듭나는 계기를 마련한다.

시노다는 음성적인 사업보다는 조직의 사업을 양성화하는데 주력했는데 복잡한 다단계의 지배구조를 통해, 건설 식품 운송 등 비롯한 다양한 영역의 기업들을 우회적으로 소유했다. 덕분에 국책사업이라 할 수 있는 간사이 국제공항 및 중부 국제공항 건설, 국립 대학의 기숙사 건설 등에도 참여할 정도까지 조직을 성장시켰다.

야마구치구미 제6대 보스 시노다 겐이치가 사람들이 붐비는 역사에 나타나 일반인들의 사진촬영에 기꺼이 응하고 있다. <사진=인터넷커뮤니티>

시노다는 전세계 조직폭력계의 ‘스티브 잡스’로 불리운다. 통념을 깨는 비범한 행보 때문인데 대표적인 것이 조직의 이미지 개선 프로젝트다. 검은 돈을 쓸어 담는 조직폭력배에 불과한 자신들을 의리의 사나이로 위장하는 영화에 적극 투자해 이미지 세탁을 시도하고 조직의 말단 간부를 선발하는 채용공고에 법학 시험을 포함시키기도 했다. 야마구치파가 일반 기업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서다.

이미지 개선 사업 중에서도 가장 화제가 됐던 것은 ‘할로윈 파티’. 폭력단에 선입견 조차 생기지 않을만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야마구치 조직원들이 고베지역에서 700개에 달하는 할로윈 선물 꾸러미를 나눠 준것이다. 그러나 지난해에는 조직내부에 내분이 생기면서 어린이들의 안전을 염려해 할로윈 행사는 취소됐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특히 2011년 4월 그가 형기를 마치고 출사한 이후부터 더욱 강화되고 있다.

야마구치구미 6대 보스 시노다 겐이치가 총도법 위반 혐의로 2005년 구속됐다가 2011년 만기 출소하여 고베시 본부에 들어가는 모습.<사진=FNN 뉴스 화면 캡쳐>

마구잡이로 검은 돈을 벌던 폭력집단이 경제, IT전문가들과 손잡고 주가조작과 기업합병을 추진하며 지능형 폭력조직으로 거듭나고 있는 야마구치구미.

이들이 거액의 검은 돈으로 국제금융시장을 흔들어대는 걸 참다 못한 오바마 美대통령은 6대 보스인 시노다를 포함한 야마구치파 간부 4명에 대해 자산 동결 등 경제제재를 발표한 바 있다. 국제적 마약 밀수와 자금세탁을 억제하기 위한 조치다.

저작권자 © 프레스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Tag키워드
#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