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합성=프레스맨>

지난 11월 25일 일본 최대 야쿠자 조직 야마구치구미(山口組)가 고베(神戶) 본부에서 100주년 기념식을 열었다.

일본 경시청이 2013년 집계한 야마구치구미의 조직원 수는 1만6000여명이다. 2만명을 넘던 조직원 수가 줄고 있는 추세이지만, 경제 전문지 포천에 따르면 작년 조직의 연수입은 800억달러(약 96조)에 달한다.

1915년 고베항에서 소규모 폭력 집단으로 시작한 야마구치구미가 100년간 생존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일본의 언론 매체 등은 이 조직이 성공적인 현대 기업의 경영 모델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지만 그러한 경영 시스템 도입의 토대를 만든 사람이 바로 제3대 보스 다오카 카즈오다.

제2대 보스 야마구치 노보루의 사망으로 4년간 공석이었던 야마구치구미의 보스 자리를 차지한 다오카. 취임 당시 나이는 불과 33세였고, 조직원 수는 33명 뿐이었다.

당시 야쿠자의 주된 수입원이었던 도박은 경륜, 경마, 경정 등 공영경기가 유행함에 따라 점점 설자리를 잃어 가고 있었다.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던 다오카는 1947년 민간 무역 재개가 허용된 것을 계기로 항만사업에 적극 진출, 1949년 고베항 선내 하역업체 15개가 모여 '항동회'를 결성하고 본인이 회장에 취임한다.

그는 또 연예 기획사에서 돈을 뜯어내기 급급했던 다른 조직들과는 달리 100만엔을 투자해 연예 기획사 '고베 예능사'를 세운다. 그리고는 당대 최고 인기스타 미소라 히바리, 타바타 요시오 등을 소속 가수로 두면서 엄청난 수입을 거뒀다. 그 과정에도 불법이 공공연히 자행됐다.

예컨대 소속 가수가 음반을 내거나 공연을 하면 지역 유지들에게 표를 강매하는 식이었다. 이같은 방식은 오늘날까지도 은연중에 이어져 왔다. 몇해전 일본의 국민MC로 불리우던 코미디언 시미다 신스케(島田紳助)가 편지를 주고 받을정도로 야쿠자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사실이 알려져 연예계에서 퇴출된 바 있는데, 그때의 상대가 야마구치파의 두목이었다.

항만사업과 연예기획사업은 야마구치구미의 양대 수입원으로서 야마구치구미가 전국적 조직으로 발돋움 할 수 있는 경제적 뒷받침이 되었다.

이렇게 야마구치구미가 연예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을때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한다. 1953년에 일어난 배우겸 가수 츠루타 코지가 야마구치구미 조직원들에게 습격, 폭행을 당한 일명 '츠루타 코지 습격 사건' 이다. 이 사건이 언론을 통해 연일 보도되는 바람에 외려 광고효과(?)가 되서 이 때 까지만 해도 지방의 듣보잡 조직이던 야마구치구미는 당당한 전국구 스타 조직(?)으로 거듭나게 된다.

또한 이 사건 이후로 "야마구치구미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큰 봉변을 당한다"는 소문이 무성해지며 연예계에서도 점차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두려움의 존재가 된다.

당시에는 프로야구 시합도 그 지역 야쿠자들에게 인사를 해야만 했으나 프로야구 팬이었던 다오카는 "야구는 국민적인 오락이다" 라며 야마구치구미가 전국적 조직이 된 이후에는 이같은 악습을 없애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야마구치구미는 세력 확장 속도를 가속화하기 시작하는데 소위 야마구치구미의 전국 정벌이라 불리는 세력 확장을 시도, 이때 활약한 재일 교포 야쿠자인  야나가와 지로등의 활약에 힘입어 전국구 조직으로 발돋음 하게 되었다.

65년 기준 야마구치구미는 산하 343개 구미, 1만명의 인수를 자랑하기에 이른다. 이 시기부터 시작된 야마구치구미의 전성기는 조직의 연간 매상이 100억이 넘었으며 도박, 고리대금업, 스포츠 및 흥행업에 이르기까지 약 5000개 이상의 기업에 영향력을 미치며 이중 5억가량을 경찰에 상납하는 등 엄청난 수준을 자랑했다.

야마구치구미의 힘이 어느정도 감소한 시기의 기록이지만 84년 마이니치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야마구치구미 한 간부가 밝힌 바에 따르면 야마구치 조직원들의 벌이는 말단 꼬붕들의 평균 연수입이 330만엔정도이고, 클럽지배인급이면 약 1000만엔, 중간급 두목이면 연간 3000만엔정도를, 대부급이면 1억정도를 챙겼다고 한다.

정재계와 결탁하여 뒷세계에서 일본을 좌지우지하는 흑막같은 이미지로 그려지는 야쿠자 역시 야마구치구미로부터 비롯되었는데 리즈시절의 야마구치구미를 이끌던 다오카는 표면적으로 항만용역추진협회를 통해 현직 교통상이었던 고노 이치로의 정치적 후원을 받았으며 항만노조를 부두에서 잔혹한 폭력으로 몰아냄에 따라 정치적으로도 탄탄한 입지를 다졌기 때문이다.

1964년 해마다 늘어가는 조직폭력단에 골머리를 알턴 일본 정부는 '폭력단근절대책요강'을 발표하고 그 해 2월, 일본 경시청은 '조직 폭력 범죄 단속 본부'를 설치, 조폭 전국 일제 단속( 제1차 정상 작전)에 돌입한다. 제1차 정상작전이란 일본 경시청의 호령으로 1964년 2월부터 1969년 4월까지 실시한 폭력단근절 단속작전을 일컫는다.

일본 경찰청은 단속작전의 일환으로 10대 광역 폭력단을 지정했다. 10대 광역 폭력단은 고베·야마구치 구미, 코베·혼다회, 오사카·류천 조, 아타미·금정회, 도쿄·마츠회, 도쿄·스미요시회(회장은 적상 요시미츠)도쿄 일본 국수회, 도쿄·토세이회, 가와사키·일본 의인당 도쿄 키타 호시회였다.

1965년 일본 경시청은 야마구치구미에 대한 제1차 정상작전을 본격화했다. 경시청은 야마구치구미 해체를 위해 자금의 원천이었던 고베항만사업에 사정의 칼날을 들이대자 견디다 못한 다오카는 항만사업에서 철수한다.

제1차 정상 작전 후에도 야마구치구미는 꾸준히 세력확장을 하지만 야마구치구미가 몰락의 징조를 보이기 시작한건 1978년 벨 아미 나이트클럽에서 벌어진 다오카 암살시도 사건으로부터였다.

관서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야마구치구미였지만 여전히 그에 반하는 조직 또한 존재했는데 75년 야마구치구미와의 싸움에서 오야붕을 잃은 마츠다구미의 조직원 나루미 기요시는 대범하게도 야마구치구미의 영역 한복판에서 권총으로 암살을 시도한다. 이 암살시도에서 다오카 카즈오는 간신히 살아남지만 그 충격으로 몇달간 두문불출하게 되면서 그 카리스마에대한 조직 내 의심이 짙어진것이다.

특히 이 시기에는 너무 커진 야마구치구미에 대한 경찰의 수사망이 강화되고 야마구치구미 내부의 장년층과 청년층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조직의 정책에 반대하는 오야붕이 23명이나 경찰에 잡혀가는 등 내외부적으로 위기가 심화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이른바 경찰관 1100여명이 동원된 80일 전투라고 불리는 전후사상 최대규모의 소탕작전이 시작되었고 그 결과로 단 2달만에 간부 518명, 조직원 2000명이 구속되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다오카의 오른팔이자 조직의 2인자 야마모토 겐이치마저 구속된다.

결국 연속으로 발생한 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다오카 카즈오는 60명이 넘는 신문기자들을 자신의 호화자택에 불러 그 자리에서 조직이 대중과 경찰에 폐를 끼친 것에대해 사과하는 굴욕적인 기자회견을 가지게된다. 이 기자회견 이후 완전히 은거에 들어간 다오카 카즈오는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기 시작했으며 80년 야마구치구미의 홋카이도 진출의 실패이후 81년 심장마비로 사망하게 된다.

다오카 가즈오가 집권한 35년간의 야마구치구미는 일본 최대의 폭력조직으로 성장했다.

다오카 카즈오는 강한 폭력 신봉자였으며 "야마구치구미는 다른 조폭보다 강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폭력단끼리의 항쟁은 많은 비용이 발생한다. 조직원이 체포되거나 하면 막대한 변호사 비용이 발생하고 교도소에 수감되면 그 가족의 생활비까지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오카는 이러한 비효율성을 무릎쓰고 폭력단 항쟁을 반복하며 야마구치구미를 강한 폭력 조직이라고 각인시켰다. 이는 결과적으로 다른 폭력조직보다 우위를 점하게 되는 강점으로 작용했다.

또한 "야마구치구미는 부모마저 버린 야쿠자들을 모아서 관리해 주고 있다. 만약 이런 야마구치구미가 해산된다면 도대체 누가 이런 야쿠자들을 관리해 주나?"라는 지론을 펼치며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예전의 야쿠자들은 도박 등을 주 수입원으로 삼아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다오카는 남달랐다. 도박 등이 아니라 조직원들에게 직업을 갖도록 독려해 합법적인 사업을 운영토록 했다.

야마구치구미의 발전의 원동력이었던 합법적인 사업 운영 중에서도 으뜸은 조직개혁이었다.

경찰의 조사나 경기 동향에 민감한 야쿠자세계에서 자금원의 확보는 절대적인 것이다. 그것을 위해 다오카는 조장이나 사제에게 견실한 법인체의 대표로서 조직원들과는 일절 관계를 갖지 않도록 했다.

이렇듯 조직의 계획성과 안정을 꾀한 점이 전국단위의 폭력조직으로 발돋움 할 수 있는 커다란 토대가 된 것이다. 그 결과, 1950년대부터 60년대에 걸쳐 하부 조직이 전국으로 진출해 각지에서 항쟁사건을 일으키며 대중의 두려움과 비판을 한몸에 받았다.

또한 그는 조직의 구성을 피라미드 형으로 갖췄다. 그는 직계 부하 전원을 2차 단체의 조장으로 독립시켰다. 또한 2차 단체의 두목은 2차 단체 두목의 부하를 조장으로 3차 단체를 갖게했다. 말단 조직을 움직이기에 무척 편리한 구조인 것이다.

두려움과 선망의 대상이었던 야마구치 제3대 보스 '다오카 카즈오', 그는 이렇듯 야쿠자 사회에 혁명을 가져온 인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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