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血역사의 태동…‘야쿠자(8·9·3)’의 탄생

일본 전역에 2만명여명의 조직원을 둔 일본 최대의 폭력 조직 야마구치구미(山口組)가 분열 상태에 들어선지 3개월이 경과됐다. 일본 정부마저 긴장케 만드는 100년 역사의 폭력단 야마구치구미의 매출규모는 2013년 기준 800억달러(96조)에 달하며 매출규모만으로는 일본기업 순위 8위에 해당한다. 최근의 분열사태 계기로 일본 최대 폭력조직 야마구치구미(山口組)의 과거와 현재를 재조명해본다. <편집자주>

문신과 오야붕의 일본 폭력조직 ‘야쿠자’

마피아, 중국의 삼합회(三合會)와 함께 세계 3대 폭력조직인 ‘야쿠자’는 일본 헤이안 시대(794~1185년)의 '바쿠도(博徒, 도박 집단)'으로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야쿠자’라는 말의 어원은 확실하진 않지만 도박용어가 어원이라는 게 통설이다.

화투 놀이 중 하나인 산마이(三枚, 혹은 오이초카부おいちょかぶ)라는 도박은 3장의 패를 뽑아 합계치의 1자리 수의 대소를 겨룬다.

8·9의 눈이 나오면 합계가 17, 1자리 수가 7이 되므로 상식적인 사람은 여기서 또 한 장 뽑는 일이 없지만, 사행심이 강한 무리들은 여기서 다시 한 장을 뽑는다. 최악의 경우 결국 3을 뽑아 끗수가 ‘0’(8+9+3=20)이 되고 만다.

즉, 三枚 도박에서 가장 쓸모없는 패인 망통(즉, 0)이 되는 화톳장 8(야), 9(쿠), 3(자)처럼 사회적으로 ‘아무 쓸모가 없다’는 뜻에서 도박으로 생활을 하는 자를 ‘야쿠자’로 부르게 되었고 차츰 일정한 일정한 직업이 없이 폭력을 휘두르며 남을 등쳐먹는 건달이나 폭력조직을 일컫는 단어로 의미가 변하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아무짝에 쓸모없던’ ‘야쿠자’의 탄생

이러한 어원을 가진 ‘야쿠자’는 1867년 메이지 유신 이후 하역장 인부들을 회원으로 끌여들여 조직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우익정치인들과 연계해 좌익세력에 폭력을 행사하며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정부와 밀접한 공생관계를 유지하던 이들은 1930년대 일본이 대륙으로 세력을 확장하자 토지개발 사업권 등을 얻어 세력을 더욱 넓혀 나간다.

야쿠자는 ‘야마구치’ ‘이나카와’ ‘스미요’ 3대 조직을 형성하며 일본경제가 비약적인 발전을 하는 1960년대에 그 전성기를 맞이한다.

이러한 ‘야쿠자’ 세력 확대의 정점에 있는 것이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야마구치구미다.

야마구치구미는 1915년 야마구치 하루요시(山口春吉)가 고베항 노동자 30여명과 함께 결성한 동네 폭력배가 시초다. 마약 밀매와 도박, 매춘을 비롯해 부동산 투자 등 돈이 되는 각종 이권에 손을 댔다.

10여년간 야마구치구미를 운영하던 야마구치 하루요시는 1925년 당시 23세에 불과한 자신의 아들 야마구치 노보루(山口登)에게 조직을 물려주고 은퇴했다.

야마구치 노보루는 당시 부친의 오야붕이었던 오오시마와의 대립을 무릎쓰고 이 무렵 많은 인기를 끌던 유랑극단의 흥행사업에 손을 대 지방공연 그리고 공연장 경비 등등 돈이 되는 곳에 야마구치 구미를 적극 투입하여 돈을 모았다.

관서지방에서 유랑극단 흥행에 재미를 본 노보루는 관동지방까지 손을 뻗쳤으나 출장갔던 동경 아사쿠사의 뒷골목에서 야쿠자로부터 습격을 받아 큰 부상을 입고 2년 후인 1942년 이때 입은 상처가 원인이 돼 사망하고 만다.

제3대 보스 다오카 카즈오(田岡一雄)는 누구

보스의 공석으로 인해 공중분해 위기까지 직면했던 야마구치구미는 패전과 함께 아직 중학생에 불과했던 노보루의 아들 유키히로 대신에 생전 노보루의 총애를 받던 다오카 카즈오(田岡一雄)를 제3대 보스로 추앙한다.

카즈오는 1913년 생으로 도쿠시마 현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1931년 노보루가 조직을 이끌던 당시 노보루로부터 사카즈키(*盃)를 받고 정식으로 조직에 몸담게 된다. 그의 나이 19살 때였다.

정식 조직원이 된 다오카는 야쿠자로서 두각을 나타내던 중 1937년 타 조직원을 살해한 혐의로 징역 8년의 형을 받고 감옥에 수감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때의 수감기간이 오히려 다오카를 극심한 야쿠자 항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의 몸을 보호하게 된 계기가 된다.

1943년 특별 출소하게 된 다오카는 일본의 패전과 제2대 보스 노보루의 사망으로 조직 존폐의 기로에 처한 야마구치 조직원들의 추앙 속에서 4년간 공석이었던 야마구치구미의 제3대 보스로 그의 나이 33세이던 1946년 취임한다.

야마구치구미의 일개 조직원에 불과하던 다오카가 보스 자리를 꿰찬 것은 이례적인 일이지만 이는 일본 패망 후 조직의 앞날을 두려워하던 조직원들이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다오카가 원하던 원하지 않았던 제3대 보스 다오카 카즈오가 야마구치구미를 일본의 최대 폭력조직으로 키울 줄은 그 당시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사실이었다.

(*盃 : 야쿠자 세계에서 오야붕(親分)과 꼬붕(子分)이 정식으로 관계를 정하는 의식 때 사용하는 접시형태의 술잔을 말하거나, 의식 그 자체를 일컫는 단어)

<계속>

저작권자 © 프레스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Tag키워드
#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