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국민이 선택한 히틀러

(프레스맨, PRESSMAN= 이준 기자)

하이퍼 인플레 상에서는 돈의 가치는 점점 없어진다. 그러나 가치가 없어지는 것은 돈 뿐만 아니라 국채, 예금, 연금, 생명보험 등 명목으로 가치가 고정되어 있는 모든 것은 시간과 함께 그 가치를 잃어간다. 예금이나 연금, 보험만을 의지하며 살고 있는 고령자 들의 생활은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퇴직 후의 연금을 위해 묵묵히 몇 십 년을 일해온 노동자들은 갑작스레 무일푼의 신세가 되는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나라가 발행하는 국채라서 안심하고 투자했던 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국채가 종이보다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고 망연자실했다.

하이퍼 인플레에 의해 무일푼의 신세가 된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 막대한 부를 축척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하이퍼 인플레율이 정확하게 계산되지 않았을 당시에 돈을 빌렸던 사람들이다. 이틀 만에 물가가 두 배가 될 때는 오늘 1만원을 빌려 물건을 산 사람은 이틀 후에 그 물건을 팔면 2만원이 된다. 이틀간의 금리가 예를 들어 10퍼센트라는 높은 이자율이라고 쳐도, 이자는 1,000원밖에는 되지 않으니 빌린 사람은 이자를 주고도 9,000원의 이익을 얻을 수 있다. 단 이틀 만에 90퍼센트의 이익을 올릴 수 있다. 빌리면 빌릴수록 이익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역으로 예금이나 국채를 구입하여 연금 보험료 등을 지불하는 자금의 공급자는 이틀 후에 이자를 받아도 이틀 전의 반밖에는 물건을 구매할 수 없다.

하이퍼 인플레는 이와 같이 부를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재분배한다. 하이퍼 인플레로 가장 커다란 손해를 보는 사람은 열심히 착실하게 일한 사람들이었다. 역으로 큰 이익을 본 사람들은 돈을 빌려 토지를 비롯한 상품에 투자한 투기꾼 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분배의 불평등과 경제적 안전성의 상실은 정치체제를 뒤흔들어 놓게 되어 있다. 사람들은 정치적인 자유와 민주주의 보다 더 “법과 질서”를 외치게 된다.

독일국민이 선택한 히틀러

독일의 하이퍼 인플레가 정점으로 치닷던 1923년, 만 34세의 히틀러는 짧게 나치당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독일어 약자로 NSDAP)의 독재적 지위를 가진 당수로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가 내세웠던 당의 강령은 민주공화제 타도와 독재정치의 강행, 민족주의와 반 유대주의 그리고 백화점과 국제 자본 공격 등이었다. 그의 선동적인 연설은 오늘날에도 유명하지만, 당시의 경제상황을 미루어 짐작하면 그의 주장은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시의적절했던 내용과 선동적인 연설로 일반 대중들의 지지를 이끌어 내던 히틀러는 베니토 무솔리니와 파시스트 당의 로마진군에 자극받아 1923년 11월 뮌헨에서 봉기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투옥된다. 옥중에서 출판한 “나의 투쟁”이라는 저서를 통해 동유럽을 정복하고 게르만 민족의 생존권을 동방으로 확장하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하며 민중의 지지를 받은 그는 짧은 6개월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합법적인 운동을 통해 민주 공화제를 내부로부터 정복할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하지만 당은 사실상 해체 상태였고 재건을 위해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 이유는 히틀러의 뮌헨봉기 1개월전에 단행된 “통화 개혁 선언” 때문이다.

렌텐마르크의 기적

1923년 10월 15일에 “1렌텐 마르크는 1조 마르크에 해당한다”라는 새로운 통화의 도입이 선언됐다. 이날 이후 라이히스 은행의 업무는 렌텐 은행에 의해 넘어가게 된다. 렌텐 은행이 발행할 수 있는 최대의 통화량은 32억 렌텐 마르크로 제한됐고, 또한 정부가 발행하는 증권의 렌텐마르크의 인수액도 12억 마르크로 상한액을 정했다. 정부는 세수를 증대해 나가는 것과 함께 재정지출을 삭감하는 개혁을 실시하였다. 1924년이 되자 정부재정은 흑자로 돌아서고 정부의 중앙은행으로부터의 추가적 대출도 끝나 인플레는 종식되었다. 이 인플레의 급격한 종식을 “렌텐 마르크의 기적”으로 부른다. 이 화폐개혁으로 인해 독일 경제가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하면서 극좌와 극우 정당들은 지지를 점차 잃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화폐개혁과 미국의 원조로 인해 독일 경제는 부흥하게 된다. 당시 영국, 프랑스는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미국에 상당한 빚을 지고 있었고 아직 경제가 불안한 독일 또한 영국, 프랑스에 배상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못했다. 이에 미국, 영국, 프랑스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 미국은 독일에 원조를 하여 독일 경제를 부흥시키고, 2. 독일은 부흥된 경제력을 바탕으로 영국, 프랑스에 배상금을 제대로 지급할 것, 3. 영국, 프랑스는 독일에게 받은 배상금으로 미국에 빚을 갚을 것 등의 3가지 원칙에 합의했다. 이것이 일명 ‘도스’안이라고 한다. 어차피 독일 경제의 부흥이 피폐해진 유럽경제에 도움이 될 것이기에 프랑스 또한 종래의 강경한 입장에서 선회하여 독일 경제 부흥에 합의하게 된다. 이후 이 ‘도스’안에 의해 독일 경제는 부흥되고 이에 따라 유럽경제도 안정을 찾게 된다. 즉, 이러한 경제적안정은 극우, 극좌의 정치세력의 지지자들이 이탈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 케이블·위성TV Q채널이 2009년 방영한 6부작 다큐멘터리 ‘히틀러의 홀로코스트’ 화면 캡쳐

히틀러 출현은 세계대공황의 산물

“블랙먼데이”로 더욱 잘알려진 1929년 10월의 뉴욕증권시장의 폭락으로 시작된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기업들이 도산하고, 살아나던 독일 경제는 실직자 수가 6백만 명으로 늘어나는 등 큰 타격을 입게 된다. 또한 주요 선진 자본주의국(또는 제국주의국)은 자기 나라의 시장부족과 실업증대를 해결하기 위해 식민지와 종속국을 묶어 자급자족적인 블록경제를 형성함으로써 블록 상호간의 무역거래를 사실상 중단시킨다.

“블록 경제”란 용어는 1932년 오타와에서 열린 영제국 경제회의에서 영국과 그 속령 간에 특혜관세가 설치되면서부터 등장했다. 당시 공황의 여파와 국제금본위제의 붕괴는 세계 여러 나라를 통화권 별로 분열시켜 파운드 블록, 달러 블록, 마르크 블록, 프랑 블록, 엔 블록 등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각각 열강을 중심으로 경제권을 형성하면서 세계 경제의 분단을 지향하고, 차별관세 및 구상무역, 수입통제, 외환관리 등의 정책으로 역내의 자원과 시장에 대한 배타적 지배를 강화했다. 또한 블록 내에서는 국가간 요소이동을 자유화함으로써 지배국의 자본 수출이나 기업 진출을 촉진시키는 반면, 식민지나 속령의 공업발전을 억제함으로써 국제분업체제를 구축하고 경제적 지배·예속 관계를 고정시켰다.

이러한 경제환경의 변화속에서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스는 1932년 4월에 치뤄진 대통령 선거에서 36.8%까지 득표했으나 사회당의 힌덴부르크에게 아쉽게 패한다. 하지만 2년 후인 1934년 힌덴부르크의 사망 후 치뤄진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의 지위를 겸하여, 그 지위를 ‘총통 및 수상’이라 칭하고 명실상부한 독일의 독재자가 된다.

역사를 되돌릴 수는 없겠지만, 세계대공황의 발발과 같은 경제적환경이 갖추어지지 않았다면 아우슈비츠나 제2차 세계대전등은 상상속의 이야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계 대공황과 블럭경제라는 대내외적인 여건과, 유럽제패와 위대한 독일제국의 대생존권 수립이라는 독일 국민의 열망은 히틀러라는 전대미문의 독재자를 불렀고, 독일 아니 전세계를 피의 바다로 내모는 결과가 된다.

하이퍼 인플레 상에서 피폐해질 때로 피폐해진 독일 국민들의 마음에 히틀러는 어떠한 인물로 비춰졌을까? 또한 세계대공황의 발생과 함께 블록경제와 식민지 구축이라는 국제적인 역학 구도상에서 독일 국민을 가장 잘 이끌 수 있는 리더는 히틀러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정착되어 있는 오늘의 대한민국에서도 국민들이 원하는 바는 당시의 경제적 여건에 따라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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