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조압력’에 더해 90년대 일본 신사복 불황 겹쳐···남성들보다 여성들에게 먼저 침투

신주쿠(新宿)에 위치한 일본 수트 전문점 ‘요후쿠노아오야마’. 취업 활동 시 착용하는 ‘리쿠르트 수트’를 전면에 배치하고 있다. (사진=최지희기자)
신주쿠(新宿)에 위치한 일본 수트 전문점 ‘요후쿠노아오야마’. 취업 활동 시 착용하는 ‘리쿠르트 수트’를 전면에 배치하고 있다. (사진=최지희기자)

일본 취업을 준비해본 사람이라면 접해봤을 법한 노하우 중 하나가 “반드시 ‘리쿠르트 수트’라 불리는 정형화된 검정색 정장을 착용하라”는 것이다. 실제 일본의 기업설명회에 가보면 남녀 할 것 없이 거의 전원이 까만색 정장을 입고 앉아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같은 광경은 일본인들에게도 ‘언제부터 까만 정장 일색이 되었는지’ 의아한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는 모양이다. 도쿄신문은 과거에 비해 훨씬 다양성을 잃어버린 현상에 대해 우려하는 전문가의 견해를 실어 보도했다.

한국에서 검정색 정장은 주로 장례식이나 결혼식 등과 같은 경조사가 있을 시 착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는 물론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청년들이 개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천편일률적인 검정색 정장 차림으로 면접장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는 모습은 ‘이색’을 넘어 ‘우려’스럽기까지 하다. 일본에서 말하는 ‘동조압력(同調圧力)’, 즉 획일화된 집단의 논리에 개인을 맞춰야 한다는 의식이 극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다만 ‘리크루트 수트 사회사(社会史)’라는 이름의 책을 펴낸 다나카 노리나오(田中里尚)씨는 “동조압력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하나의 요인만이 지금의 리쿠르트 수트를 낳게 된 것은 아니다. 다양한 요소가 합쳐진 결과”라고 설명했다.

전후 일본 남학생의 취업 복장은 ‘학생복’에서 ‘사회인으로서의 첫걸음’을 상징하는 수트로 변모해왔고, 그 색상은 군청색이 주류를 이뤄왔다. 그러던 것이 최근에 와 검정색 일색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얘기인데, 그 발단이 된 것이 바로 90년대 ‘신사복 불황’이었다. 다나카 씨에 따르면 리쿠르트 수트의 가격이 떨어지면서 업체들이 이윤을 남기기 힘들게 되자 90년대 후반부터는 날씬하게 보이는 효과가 있는 짙은 회색이나 검정색 정장을 선택지로서 제시하게 됐다.

여기에 미디어 상황도 영향을 미쳤다. 인터넷이 널리 보급되면서 젊은 세대들이 취업 스타일에 대해 인터넷상의 정보를 많이 참고하게 된 결과, “검정색 정장은 비지니스에서는 입지 않는다”는 상식 대신 “검정색도 괜찮다”, “지적으로 보인다”와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신사복 업계들도 이에 발맞춰 계속해서 검정색 정장을 늘려 지금의 상황에 이르렀다는 설명이다.

일본 수트 전문 업체 ‘아오키’의 ‘리쿠르트 수트’. ‘궁극의 취업 수트’라는 문구 아래 소개된 가장 기본적인 스타일은 단연 검정색 정장이다.  (이미지: 아오키 홈페이지)
일본 수트 전문 업체 ‘아오키’의 ‘리쿠르트 수트’. ‘궁극의 취업 수트’라는 문구 아래 소개된 가장 기본적인 스타일은 단연 검정색 정장이다. (이미지: 아오키 홈페이지)

한편 여학생의 경우 1985년 남녀고용기회균등법이 제정된 후에도 기업으로부터 ‘직장의 꽃’과 같은 역할을 요구 받으면서 ‘블라우스 상의에 리본 넥타이’와 같은 여성스러운 복장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점차 활발해지면서 역할 구분에 있어 남녀 차이가 줄면서 “여성미를 어필하지도 않으면서 완전히 남자 같지도 않은 중간 스타일”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같은 과정에서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장 착용 빈도가 적은 여성들이 관혼상제 시에도 입을 수 있는 검정색 정장을 찾게 되었고, 그 결과 남성보다 빨리 검정색 정장이 침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본의 한 40대 직장인은 “입사 면접 시 지원자들이 검정색 정장을 입고 오는 것이 당연시되는 분위기다 보니, 색상이 다르거나 독특한 디자인의 옷을 입고 오는 지원자들에게는 편견이 생기는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보수적인 일본 기업 문화의 상징이 된 검정색 정장 일색에서, 각자의 개성이 드러나는 차림으로 변화하는 날이 올 수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 [프레스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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