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시작된 북송사업… 25년간 9만 3천명이 꿈을 안고 북한으로

11월 17일 도쿄(東京)도내에서 열린 ‘북한귀국자의 기억을 기록하는 모임’. 일본에서 북한으로 건너갔다 탈북한 재일 동포들이 참석해 증언하고 있다.  (사진=최지희기자)

[프레스맨] 일제 강점기, 한국 전쟁, 남북 분단과 같은 어두웠던 수난의 현대사 속에서 보다 나은 삶을 갈망하며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이들이 있었다. 그렇게 일본 땅에 정착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일본 사회의 심한 편견 및 차별과, 벗어날 수 없는 가난의 굴레였다. 

재일교포라는 이유로 고통받던 이들에게, 1955년 2월, 북한이 손을 내밀었다. “매일 쌀밥에 고기 반찬을 먹을 수 있다”, “남녀노소 대학까지 배움의 기회가 열려 있다”라는 구호는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안은 채 살아가던 재일동포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전쟁 후 한국과의 치열한 체제 경쟁 하에 경제재건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북한은 이같은 선전과 함께 재일동포들을 불러들였다. 북한과의 관계 진전을 원했던 당시 일본 정부는 “원하는 대로 조국에 보내주겠다”며 ‘인도주의’라는 미명하에 이들의 추방을 정당화했다. 한국 정부는 재일동포 북송사업을 적극 추진하던 일본 정부에 거세게 항의했지만, 정작 한국 땅을 밟고자 희망했던 이들에게 문을 열어주지는 않았다.  

북한과 일본 양 정부의 북송 추진 사업은 1959년 12월 14일, 975명을 태운 배가 일본 니가타(新潟)항을 출발하면서 시작됐다. 북송자들 중에는 재일동포의 일본인 아내와 일본 국적의 자녀 6천 678명이 포함돼 있었다.

그리고 25년간 북송 사업은 계속됐다. 올해 12월이면 약 9만 3천명의 재일동포와 일본인들이 북한으로 떠난 지60년이 된다. ‘지상의 낙원’이라는 선전을 믿고 가난과 차별을 피해 ‘조국’의 품으로 돌아간 이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그리고 역사는 북송 사업을 어떻게 기억하고 기록해야 할까. 

일본의 연구자 및 저널리스트들이 뜻을 모아 설립한 ‘북한귀국자의 기억을 기록하는 모임’이 주최한 심포지엄에 참석해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일본, 한국, 북한에서도 이방인이었던 이들의 ‘외로움’, 그리고 ‘기억’

이시가와 마나부씨가 마이크를 잡고 증언을 하고 있다. (사진=최지희기자)

도쿄(東京)에서 태어난 이시가와 마나부 씨는 1972년 8월, 14살의 나이에 북한으로 건너 갔다.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조선학교를 다니며 ‘조선인’이라는 자각을 가진 채 자랐다. 부모님은 이혼을 했고, 그렇지 않아도 어렵던 가정 형편은 더욱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는 “당시 우리들 조선인은 머리가 좋아도 일본 대학에 갈 수 없었다. 많은 젊은 조선 청년들이 나쁜 곳으로 빠지곤 했다”고 말했다. 이시가와씨의 누나는 조선총련의 기관지 ‘조선신보사’에서 일했다. 누나의 끈질긴 설득 끝에 어머니를 일본에 남겨두고 북한으로 떠났다. 

그러나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꿈과는 거리가 먼 현실이었다. 북에 가면 가장 먼저 대학에 들어가 공부하고 싶다던 누나의 꿈은 짓밟혔다. 소위 ‘열성분자’였던 누나에게 마저 배움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믿었던 만큼 충격이 컸던 누나는 북한으로 간지 2년만에 정신병을 얻어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다 1991년 사망했다. 

이시가와씨는 북한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다. 많은 수의 귀국자들이 같은 처지의 귀국자들끼리 결혼하는 것이 보통이었던 것에 반해, 그는 북한 여성과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고난의 행군때는 집안에 있던 텔레비전과 냉장고, 침대 매트리스까지 팔아 자식들을 먹여 살렸다. 결국 탈북을 결심한 그는 2001년 12월 북한을 떠났고, 이듬해 9월 ‘고향’인 일본으로 돌아왔다. 

이창선씨는 일본 오카야마(岡山)현에서 태어나 1962년, 21살의 나이에 북한으로 떠났다. 유도 선수였던 그는 재일교포라는 이유로 올림픽 출전이 좌절되자 북한으로 건너가 올림픽에 나가는 것을 꿈꿨다. 하지만 북에서도 그의 바람은 이뤄지지 못했다. 일본에서도, 북한에서도 그의 재능을 발휘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1960년 13살 나이의 김룽실씨는 지상의 낙원으로 가자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니가타항에서 청진으로 향하는 배에 올라탔다. 북한에서는 도자기 공장에서 일하다 건설 현장 등에서 밥을 지어 식사를 제공하는 일을 했다. 북한 사람들과는 어울리지 못했다. 같은 처지의 귀국자들끼리 일과 후 기울이는 한잔 술이 유일한 낙이었다. 

2000년에 탈북해 현재는 한국에서 정착하고 있는 그는 “내가 태어난 고향인 일본으로 돌아오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한국에서의 삶은 그런대로 만족하지만, 친구가 없어 외롭다”고 털어놨다. 일본에서도, 북한에서도, 한국에서도 이방인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그가 내뱉은 ‘외로움’이라는 말이 머릿속에 무겁게 남았다. 

재일동포 북송사업은 한국도, 일본도, 북한도 언급하길 꺼려하는 아픈 현대사의 한 페이지이지만, 그냥 넘겨서도 안될 중요한 페이지이기도 하다. 60년을 맞는 지금, 제대로 기록해서 기억하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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