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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일기를 훔쳐보는 도서실
타인의 일기를 훔쳐보는 도서실
일기장 속 타인의 내밀한 사생활을 들여다보며 안도를 느끼는 곳
  • 도쿄=최지희 기자
  • 승인 2019.09.19 16: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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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시부야 산구바시역 인근 주택가에 위치한 갤러리 ‘피카레스크’에는 타인의 일기를 엿볼 수 있는 도서실이 있다.(사진=최지희기자)

(도쿄=프레스맨) 최지희기자 = 도쿄(東京) 시부야(渋谷)구 산구바시(参宮橋)역 인근의 골목을 걷다 보면 주택들 사이로 호젓이 자리한 작은 갤러리를 만나게 된다. ‘피카레스크’라는 이름의 갤러리 한 쪽 구석에는 세상에 드러날 예정이 없었던 타인의 일기와 사적인 메모들을 읽을 수 있는 도서실이 있다. 

“읽고 싶은 일기장을 선택하신 후 종을 울려주세요”

어떤 이에게도 보여줄 생각이 없었던 일기장과 수첩, 메모장들이 투명한 봉투에 담겨져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만난 적도, 만날 일도 없는 사람들의 손에 그들의 소소한 일상과 고민, 꿈들이 전해진다. 한 평 남짓의 좁은 공간에 놓여진 책상에 앉아 타인의 가장 내밀한 사생활 한 페이지를 엿본다.   

1992년 어느 여름날, 한 고등학교 남학생이 짝사랑하는 여학생을 떠올리며 쓴 일기는 웃음을 머금게 한다. “아, 오늘도 한 마디도 못하고 지나가버리고 말았다”하고 탄식하며 의기소침해 한 날이 있는가 하면, 수학여행을 가서 함께 찍은 사진을 “내 생애 최고의 보물”이라고 기뻐하며 들뜬 나날들도 있었다. 이후 여학생에게 고백했으나 결국엔 차이고 말았다는 아쉬운 스토리지만, 5권으로 묶인 일기장에는 대학생이 된 이후 그의 일상과 찬란한 연애담들이 이어진다.  

30대 중반의 한 여성은 오랜 기간 해외에서 생활하다 일본으로 돌아왔다. 새로운 환경에서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 명확한 답을 얻지 못한 채 일상이 흘러갔다. 그러던 그녀가 프리랜서 아나운서의 꿈을 가지면서 늦깎이 수험생으로 고군분투 하는 이야기들은, 조금의 과장도 없이 독자에게 전해지며 가슴을 뛰게한다. 

왼편에 보이는 카드 목록에서 읽고 싶은 기록을 골라 은색 종을 울리면 된다. (사진=최지희기자)

60대 남성 사진 작가는 매일 수첩에 그날 장을 본 내역을 십 원 단위까지 꼼꼼하게 메모했다. 생활비를 아껴가며 한달에도 수 차례 이상 각종 전시회를 쫓아다니는 열정은 그의 나이를 무색하게 만든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붉은 색 볼펜으로 “올 한 해도 무사히 지나갔구나”라고 적은 필치에서, 그가 느낀 안도감이 익숙하게 전달되어 온다. 

부모의 품을 벗어나 도시로 와 직장 생활을 시작한 여성은 히나마츠리(ひな祭り·여자아이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날)인 3월 3일, 일기장에 “고향집에 아버지가 히나인형(히나마츠리를 축하하기 위해 장식하는 인형)을 꺼내 두셨다고 했다”라고 적었다. 담담한 한 줄의 메모에서, 그녀가 느꼈을 위안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난병을 앓고 있는 어느 이의 투병 일기는 같은 병을 안고 있는 이들에게 소중한 지침서다. 아이와 함께 도서실로 찾아온 어머니는 투병기를 수 시간 째 읽고 또 읽었다.  

이처럼 누군가의 사생활의 기록들을 모으기 시작한 이는 게임 프로그래머 시라도 마사후미(志良堂正史) 씨다. 늘 새로운 무언가를 창작해 내고픈 욕구에 사로잡혀 있던 그에게 힌트를 안겨 준 것은 프랑스 문학자 히가시 고지(東宏治)가 자신이 수첩에 남긴 기록들을 모은 펴낸 책 ‘사고(思考)의 수첩’이었다. 책을 통해 타인의 생각과 아이디어를 엿볼 수 있는 수첩들을 모아보면 무언가가 발견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곳에서 소장 중인 일기들은 모두 1300여권. 기증자들도 늘고 있어 다음 달에는 추가로 200여권이 더 들어올 예정이다. (이미지: ‘수첩류도서실(手帳類図書室)’ 홈페이지)

2014년부터 인터넷상에서 타인의 일기장과 수첩들을 모집한 결과, 지금까지 1300권이 넘는 기록들이 모였다. 다음 달에도 200여 권이 추가로 들어올 예정이다. 

일기장 속 그가 누구이며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일기장을 덮은 순간, 내가 느끼는 일상, 내가 고민하는 일들이 그렇게 특별한 것들이 아님을 새삼 깨닫는다. 모르는 사이에 전해져 오는 안도감은 가장 효과적인 위로일 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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