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김정은과 ‘조건 없는’ 만남 원해···전후(戦後)이래 북일 관계와 한일 협력의 가능성은

지난 3월 15일, 도쿄 추오(中央)구 츠키지(築地)에 위치한 아사히신문 본사 2층에 북한에 납치된 요코타 메구미의 구출을 요구하는 횡단막이 걸려있다. (사진=최지희기자)

(도쿄=프레스맨) 최지희기자 = 최근 일본의 아사히신문이 복수의 정부 관계자를 통해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조건없이’ 북일정상회담을 위해 조율에 들어갈 방침이라고 전했다. 그간 일본 정부는 납치 문제에서 일정한 진전이 없으면 양 정상이 마주 앉을 수 없다는 입장이었지만, 우선 만나고 보겠다는 자세로 완전히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신문은 김정은 체제가 들어선 이후 지금까지 6자 회담 참가국 가운데 유일하게 일본만이 회담 기회를 갖지 못한 점, 두 차례 북미정상회담을 통해 북한은 ‘톱다운’ 방식만이 통용된다는 것을 확인한 점 등을 배경으로 지적했다. 일본은 유엔인권이사회에 11년 연속 제출해오던 대북 비난결의안을 올해는 제출하지 않았으며, 2019년 외교 청서에서는 핵・미사일 문제로 북한에 대해 ‘압력을 최대한 높여 나가겠다’던 표현을 삭제했다. 

일본 정부의 이같은 대북 유화 노선이 명확해지고 있는 시점에서, 북일관계의 현주소에 대해 살펴 본 후 북한 문제를 둘러싼 ‘한일 협력’은 과연 가능한 지에 대해 점검해봤다. 

북한과 일본, 어디까지 가봤나

한반도에 서로 다른 체제의 두 국가가 설립된 이래 한국과 일본은 1965년 수교를 통해 이른바 ‘정상적인 관계’에 있는 반면, 일본과 북한은 국교를 맺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러 전후 일본의 외교 과제로 남아 있다. 이는 북일 양국 차원에서의 문제일 뿐 아니라 ‘동북아 냉전’을 완전히 종식시키기 위해 언젠가는 실현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미해결 과제인 북일국교정상화를 논하기 이전에, 우선 북일 양국의 관계 개선을 향한 움직임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돌이켜보면 북일 관계 개선을 위한 의미 있는 움직임은 총 네 차례에 걸쳐 이루어져왔다고 볼 수 있다. 1956년 10월 일소수교, 1972년 9월 냉전 하의 데탕트 무드를 타고 이뤄진 중일수교, 냉전 종식 시기인 1990년 9월 가네마루 신(金丸信) 방북, 그리고 2002년 9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총리가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회담을 한 것이 마지막이다. 

이들 가운데 북일 관계의 현상을 짚어보는데 있어 가장 중점을 두어야 할 시기는 2002년 9월의 ‘북일정상회담’이다. 왜냐하면 2002년 북일정상회담은 일본의 외교 정책의 변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례이기 때문이다.
 
고이즈미 방북의 외교적, 국내정치적 의미와 그 배경은

고이즈미 방북의 의미에 대해 당시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관방장관은 “평양 선언이 이뤄짐으로써 중국, 러시아, 한국에게 인센티브가 됐다. 일본이 (북한과의) 경제협력을 확실히 내걸면서 관계국들이 6자 회담에 참가하고자 하는 계기를 선사했다”고 평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당시 북미 관계가 긴장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북일 정상화로의 움직임이 생겨났다고도 할 수 있다. 북한의 우라늄 농축 의혹이 불거지면서 미국은 일본의 대북한 접근을 경계하는 상황에서 이뤄진 고이즈미의 방북은, 북미관계가 정상화되지 않으면 북일관계의 진전은 어렵다고 보던 기존의 상식을 뒤엎는 것이었다. 

고이즈미의 전격적인 방북 퍼포먼스는 대미 자주 외교를 실현하기 위한 리더십의 표현이었다. 다시 말해 고이즈미 외교는 글로벌 냉전의 종식 후 마지막으로 남은 외교 과제인 북일 국교 수립 문제를 미국을 통하지 않는 북일 ‘직접 교섭’으로 돌파함으로써, 일본 주도의 동북아 외교 실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고이즈미 개인의 리더십만 자리하고 있던 것은 아니다. 이 시기는 탈냉전기 동아시아에 있어서의 미국의 영향력 감소, 1996년 사회당의 무라야마(村山) 정권 퇴진 후 자민당을 중심으로 ‘일본의 영향력 확대’를 중시하면서, 민족주의적 성향을 가진 우파 정치 세력의 득세와 맞물리며 일본 외교의 분위기가 바뀌는 시점이었다. 

메구미의 구출을 지원하는 단체 ‘아사가오회’가 제작한 횡단막이 아사히신문 도쿄 본사에 걸려있다. (사진=최지희기자)

한편 2002년 9월 17일, 역사적인 ‘북일정상회담’이 열렸지만 북일간의 첨예한 현안인 ‘일본인 납치 문제’에 대해 북한이 ‘5명 생존, 8명 사망’이라는 조사 결과를 전달하면서 일본 국내의 시선은 일제히 납치 피해자의 ‘사망’에 쏠리고 만다. ‘납치 문제’는 “우리도 피해자다”라고 하는 이른바 ‘피해자 의식’을 심어주면서 일본 국민들에게 일종의 카타르시스 효과를 동반했다. 결국 ‘납치 문제’는 북일관계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의제가 되면서 일본 사회 안에서 해당 문제에 대한 이론(異論) 제기는 용납되지 않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이러한 과정에서 납치 문제 해결을 강력히 촉구하는 정치세력은 문제 해결을 위한 정치적 권력을 부여 받게 되는데, 북일정상회담 후 정계에서는 납치 문제에 대해 강경책을 고수한 아베 관방부장관의 인기가 급상승하게 된다. 아베가 고이즈미의 후계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도 납치문제를 강조하며 반(反)북한 분위기를 주도한 이력이 크게 작용했다. 

한국과 일본, 북한 문제를 둘러싼 ‘공조’는 가능할까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북일 관계는 한일 혹은 한미일 관계의 틀 속에서 제약을 받아왔지만, 한일 양국의 ‘냉전에 대한 거리감’의 차이로 인해 북한의 위협에 대한 인식에는 어느정도 온도차가 존재해왔다.  

앞서 언급한 네 번의 북일 관계 개선의 기회 가운데 1965년 이후의 세 시기에는 기본적으로 한국의 용인 없는 북일 접근은 견제되어온 반면, 2002년의 사례와 같이 한국의 대북 정책과 그 방향성이 일치한 경우도 있어 왔다.  

하지만 2014년 5월, 다시 마주 앉은 북일은 ‘스톡홀롬 합의’를 통해 ‘납치문제 재조사’와 ‘대북한 제제완화’를 교환하는 것으로 의견 일치를 봤다. 결국 양측은 입장 차를 좁히지 못한 채 평행선을 달린 끝에 동력은 상실하고 말았지만, ‘납치 문제’는 북일이 미국 및 한국의 개입 없이, 즉 북한 핵문제 등의 안보 문제와는 별도로 양국이 마주 앉아 협의할 수 있는 특별한 유인으로서 존재한다는 점을 국제 사회에 다시한번 각인시켰다.

지금의 한일 관계를 놓고 보면 북한 문제에 대한 양국의 ‘공조’는 상당히 어려워 보인다. 이는 역사 문제 등을 둘러싼 갈등 심화로 인해서 뿐 아니라, 중국에 대한 인식의 차이 등 한일간의 외교적 공통 분모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한국 정부의 대북관 역시 정권에 따라 변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납치 문제’와 같은 북일 양국간의 독자적인 의제가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한 가지, ‘한반도 유사(有事)’를 피하고자 하는 점에서는 한일이 공통 인식을 보이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평화롭고 안전한 지역 질서 구축은 궁극적인 지향점이며, 이를 위해서는 상시적인 한일 전략 대화는 우선 필요하다. 설령 비공식 채널이라 하더라도 ‘동북아의 미래상’에 대해 솔직한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야 말로 서로를 위한 것이다. 상대에게 진심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아무리 못해도 ‘레이더 갈등’과 같은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마찰은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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