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서울 종로구 필운동 서촌 한옥마을. 4~5층 높이의 빌라들로 둘러싸인 골목 안쪽에 한옥 한 채가 을씨년스럽게 스러져가고 있었다. 기와가 얹혀 있어야 할 지붕은 방수천막으로 볼썽사납게 마구 쌓여있다.

이 집에 사람이 살지 않은 지 이미 수년이 지났다는 것을 느낄 정도였다. 그나마 천막을 쳐놓지 않은 쪽 기와는 군데군데 깨지고 흙이 흘러내렸고, 그 틈에 밖으로 드러난 나무 서까래는 물기에 젖어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서촌에서만 50년 넘게 살았다는 주민 허모(65)씨는 "이 집은 오성 이항복 대감이 살았다고 해 주민들은 '오성대감집'이라고 불러 왔는데, 얼마 전 서울시가'필운동 홍건익 가옥'이라며 민속문화재 지정을 공고했다" 며 "서촌 일대에 이 집처럼 방치되고 있는 집은 부지기수"라고 말했다.

▲ 북촌한옥마을은 손에 지도를 들고 다니는 외국인관광객과 출사 나온 사진사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뉴스와이어
서울 종로구 가회동 일대 북촌 한옥마을에 이어 대표적 한옥밀집 지역인 종로구 체부동ㆍ옥인동ㆍ효자동 일대의 서촌 한옥마을에 최근 빈집이 갈수록 늘고 있다. 이는 부동산 경기 침체 영향으로 개발투기수요가 급감하면서 실 거주자를 찾지 못한 채 관리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폐옥과 같이 방치돼 있는 한옥들이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27일 서울시에 따르면 서울 서촌 일대 한옥수는 총 688동으로 이 중 경찰이 공식적으로 관리하고 있는 빈집만 36채에 달한다. 이 집들은 제대로 관리가 이뤄지지 않아 붕괴 일보 직전의 안전사고가 우려될 뿐 아니라 범행 등에 이용될 가능성이 높아 경찰의 특별관리가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이 일대의 빈집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례로 영화 '건축학개론'의 촬영지로 잘 알려진 종로구 누하동 103번지 한옥은 3년 가까이 빈집으로 방치돼 있지만 현재 경찰의 관리를 받지 않고 있을 정도이다. 또 누하동의'노천명 가옥' 바로 옆 한옥 2채(누하동 223ㆍ224번지)도 수년째 사람이 살지 않고 있다.

서촌 한옥마을에 빈집이 부쩍 늘고 있는 것은 2010년 일대가 한옥지정ㆍ권장 구역으로 지정되면서 개발이 사실상 불가능해진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서촌의 경우 2000년대 북촌 한옥마을 일대에 공방ㆍ카페 개발 붐이 일면서, 이를 벤치마킹한 큰손들이 개발이익을 염두에 두고 앞다퉈 투자에 나섰다.

하지만 도시계획 변경 등으로 사실상 개발이 어려워지면서 실 거주자를 찾지 못한 상당수 한옥들이 현재 빈집으로 방치되고 있는 실정이다. 서촌에서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김모(73)씨는 "지난해 여름에만 사람이 살지 않는 한옥 2채가 비에 무너졌다"며 "한옥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으면 쉽게 망가지는 데, 누구라도 살수 있게 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서울시는 2008년 '서울시 한옥선언'을 발표한 이후 그 동안 한옥 보존을 위한 각종 대책을 쏟아내고 있다. 최근에는 은평ㆍ성북구 등지에 한옥마을 신규조성 계획 추진 안을 발표한 데 이어 한옥밀집지역 지정 확대안도 추진 중에 있다. 시는 한옥밀집지역으로 지정된 집에 대해서는 호당 최대 1억원을 보조하는 지원사업도 현재 진행 중이다.

하지만 시의 한옥보존대책이 탁상행정에 그치고 있다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한옥밀집지역의 경우 한옥 외에는 신축이 불가능하지만 기존 한옥의 철거는 가능하다는 규정이 대표적이다. 일례로 최근 서촌에 들어선 한 건물의 경우 한옥밀집지역에 있던 기존 한옥을 허문 뒤 다른 건물을 짓는 대신 주차장으로 쓰는 방법으로 규정을 피해갔다. 한옥의 경우 최대 2층으로 높이가 제한되는데, 인접한 비한옥 건물은 5층까지 지을 수 있다는 것도 문제점으로 꼽힌다.

김한울 서촌주거공간연구회 사무국장은 "지가가 높은 도심지에 위치한 한옥의 보존을 개인에게만 맡긴다면 결국 모든 한옥이 카페나 공방처럼 바뀌는 상업화의 대세를 막기 어렵다"며 "주거권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정책의 중심을 옮기고 허점이 많은 한옥 보존 규정도 시급히 손질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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