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매체 통한 성차별 표현 많은 일본…전문가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야”

(도쿄=프레스맨) 최지희기자 = 고급 술집 라운지를 연상시키는 실내 공간에 마련된 네 개의 둥근 의자. 그 한 가운데에는 돋보기 안경이 하나씩 올려져 있다. 의자 앞에 선 미니스커트 차림의 여성들이 왼편부터 차례로 엉덩이를 깔고 앉으며 짧은 탄성을 내뱉는다. 주인공 격인 남성 배우는 돋보기 안경을 손에 쥐고 “이 강도, 역시 메이드인 재팬!”하고 대사를 읊는다.

고령 사회 일본에서 최근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노년층 사이의 ‘잇 아이템’으로 등극한 돋보기 안경 ‘하즈키 루페’의 TV 광고다. 업계에서는 ‘하즈키 루페’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 데는 무엇보다 독특한 분위기의 이 TV 광고 덕분이라는 평가가 많다. 실제 지난 해 10월 일본 CM종합연구소가 뽑은 TV 광고 호감도 랭킹에서 4천 개에 가까운 광고들을 제치고 ‘하즈키 루페’ 광고가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일본에서 대히트를 친 돋보기 안경 ‘하즈키 루페’의 TV 광고 장면. 제품의 견고함을 강조하기 위한 해당 장면이 성차별적 요소를 담고 있어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이미지: 유튜브 ‘하즈키 루페 공식 CM 캡쳐’)

한편 남녀가 평등한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일본의 시민단체 ‘파리테 커뮤니티즈(Parite communities)’는 지난 해 12월 인터넷 상에서 ‘#여성차별대상 2018’을 선정하는 투표를 진행했다. 그 결과 ‘하즈키 루페’의 광고가 총 531표를 얻어 1위에 올랐다. 

‘하즈키 루페’에 표를 던진 이들 가운데는 “히죽히죽 웃는 중년 남성의 얼굴이 떠올라 너무 싫었다”, “여성들이 NO라고 먼저 이야기해야만 된다”는 등의 의견들이 달렸다.

‘하즈키 루페’를 판매하는 ‘하즈키컴퍼니(Hazuki Company)’는 여성 출연자들이 자발적인 의사로 오디션에 응모해 연기를 펼친 것이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안된다는 입장이다. 회사 측은 일부 언론의 지적에 대해 “성희롱이라는 비판은 완전히 맥락을 잘못 짚은 것”, “영화의 장면처럼 하나의 작품으로서 만든 광고다. 나부(裸婦)의 그림을 보고 야하다고 하는 것과 같은 이야기”라고 항변했다. 

남녀 평등 사회 실현을 위해 설립된 일본의 시민단체 ‘파리테 커뮤니티즈’는 2018년 12월 ‘여성차별대상 2018’을 선정했다. (이미지: ‘파리테 커뮤니티즈’ 페이스북)

‘여성차별대상 2018’에는 ‘유니버셜홈(Universal Home)’의 광고가 “가사가 여성만의 역할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이유로 순위에 이름을 올렸다. 인기 여성 예능인의 유행어인 ‘딱 적당한 추녀(醜女)’를 광고 문구로 이용한 가오(花王)의 트위터 광고도 랭크됐다. 

이 밖에도 ‘(성관계)가지기 쉬운 여대 랭킹’이라는 주제로 5개의 여자대학 이름을 게재해 여론을 들썩인 주간지 ‘주간 SPA!’를 비롯해, 유명 예능인 마츠모토 히토시(松本人志)가 후지TV 계열의 프로그램에서 여성 게스트에게 “특기인 몸을 사용해라”는 발언을 하는 등 여성 비하 표현이 대중 매체에서 끊이지 않고 등장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젠더 평등을 위한 활동을 해오고 있는 일본의 한 변호사는 프레스맨에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일본은 대중 매체들이 별다른 의식 없이 차별적 표현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짚었다. 그는 “여성들 자신부터가 문제의 표현들을 문제라고 의식 못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일본은 전후 대다수의 가정에서 ‘기업에서 장시간 노동에 종사하는 남성과 전업 주부’라는 역할 분담 아래 고도 성장을 이루어 냈다. 아사히 신문의 인터뷰에 응한 교토산업대 이토 기미오(伊藤公雄) 교수는 “여성의 사회 참여 없이 경제 성장을 해온 탓에 젠더 문제를 둘러싼 세계적 조류에 뒤쳐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여성 권익을 위한 발언을 적극적으로 하는 작가 기타하라 미노리(北原みのり) 씨는 편의점에 비치된 성인 잡지가 최근 속속 사라지고 있는 대해서도 “올림픽 한다니까 이제서야”라며 탄식했다. 그는 “차별적 표현에 둔감한 사회에서 살아가면 이를 깨닫기도 어렵다. 여성들이 나서서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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