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총리 당선 직후 ‘대국민집회’ 참석···‘납치문제 해결’ 거듭 천명

23일 오후 도쿄 치요다구에서 열린 납치피해자 전원 귀환을 촉구하는 대국민집회에 참석한 아베신조 일본 총리 (사진=최지희기자 ⓒ프레스맨)
23일 오후 도쿄 치요다구에서 열린 납치피해자 전원 귀환을 촉구하는 대국민집회에 참석한 아베신조 일본 총리 (사진=최지희기자 ⓒ프레스맨)

(도쿄=프레스맨) 최지희기자 = “납치 문제 해결은 아베 내각의 최중요·최우선 과제다. 납치 피해자와 그 가족들이 만나기 전까지 내 사명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23일 오후 도쿄 치요다(千代田)구에서 열린 ‘전 납치 피해자 즉시 일괄 귀국을! 대국민집회’에 참석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일본인 납치 문제 해결이 자신의 정치적 사명임을 재확인했다.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세 번째 연임을 이뤄낸 후 새롭게 3년의 임기를 얻은 아베 총리는 유엔총회 참석을 위해 뉴욕으로 출발하기 직전 대국민집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23일 밤 트럼프 대통령과 만찬을 갖고, 또 별도의 날에 미일정상회담을 가질 예정이다. (트럼프 대통령과) 둘이서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이 문제에 대해 미일의 생각을 일치시켜 나갈 것”이라며 포부를 밝혔다. 

아베 총리는 납치문제 해결을 위해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직접 만날 것임을 거듭 언급했다. ‘납치문제대책본부장’ 직을 겸하고 있는 그는 “2002년 5명의 납치 피해자가 귀국한 이래 16년간 단 한 명도 귀국하지 못했다. 당시부터 납치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해온 정치인의 한 명으로서, 북일정상회담에 배석했던 사람으로서, 그리고 6년간 국정을 이끈 총리로서 애통하기 짝이 없다”고 강조했다.  

납치문제 해결과 북일국교정상화는 북방영토문제 해결을 통한 러시아와의 평화조약 체결과 함께 전후 일본에 남겨진 마지막 외교 과제의 하나다. 아베 총리 역시 이들 외교 현안의 해결을 공언해왔다. 특히 일본인 납치 문제는 북일 간의 관계 개선을 위한 최대 과제로, 문제 해결을 위해 양국이 마주 앉아 방안에 합의했다가도 입장차로 결렬되는 등 반목을 거듭해왔다. 

일본인 납치 문제, 어떻게 북일 최대 현안이 됐나

한편 일본인 납치 문제의 시작은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0년대 후반 들어 일본 국내에서 불특정 일본인이 이유없이 사라지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외국정보기관의 관여가 의심됐지만 실체가 분명하지 않아 사건은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다.

납치문제가 보다 세간의 관심을 받게 된 계기는 1987년 11월 29일 발생한 KAL기 폭파 사고였다. 붙잡힌 북한 공작원 중 한 명인 김현희의 진술로 자신의 일본어 교육요원이었던 ‘이은혜’라는 여성이 납치된 일본인일 가능성이 부상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실종 일본인과의 연관성을 명확히 밝혀내지 못한 채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대중의 머릿속에서 희미해져갔다.

1977년 11월 15일 니가타 현에서 당시 13살 중학생이던 요코타 메구미가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납치됐다. 이후 요코타 메구미는 일본인 납치사건의 상징이 된다.  (사진=최지희기자 ⓒ프레스맨)

1997년 2월 3일, 산케이신문이 실종 여성의 실명(요코타 메구미, 横田めぐみ)을 특종 보도하고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납치된 정황들을 제기하면서 납치문제가 본격적으로 여론에 각인되기 시작한다. 납치 피해를 주장하는 가족들이 주축이 된 ‘가족회’, 이를 지원하는 ‘구하는 회’ 등이 결성되는 등 본격적으로 해결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거세지게 된다. 

2002년 9월 17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小泉純一郎) 총리의 방북으로 열린 북일정상회담은 이전까지 납치문제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던 일본 국민들에게도 충격을 안겨준 역사적 사건이었다. ‘가족회’를 비롯한 피해자 단체 및 정치 세력은 북일정상회담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납치 피해자 구출을 정책의 1순위로 요구했으며, 미디어 역시 연일 경쟁적으로 관련 뉴스를 보도하면서 납치 문제가 정점으로 치닫게 된다. 

여론의 관심은 시간이 흐를수록 북일정상회담을 계기로 합의된 평양 선언의 의의를 평가하기 보다는 납치문제에 치중해 갔다. 평양선언은 동북아시아 평화와 안정에 기여하는 북일 관계 정상화의 밑그림을 포함하는 합의로 획기적이라 평할 만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북일 관계에 장애가 되더라도 납치 문제를 최우선시하는 입장을 점차 굳혀가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납치문제 해결을 강력히 촉구하는 세력은 문제 해결을 위한 정치적 권력을 부여받게 되는데, 북일정상회담 후 정계에서는 납치문제에 있어 강경책을 고수해 온 아베(당시 관방부장관)의 인기가 급상승하게 된다. 아베가 고이즈미의 후계자로 자리 잡게 된 데는 납치문제를 부각시키면서 반(反)북한 분위기를 주도해온 이력이 크게 작용했다. 

2006년 총리직에 오른 아베는 내각 출범과 동시에 ‘납치문제 대책본부’를 설치하고 스스로 본부장에 취임했으며, ‘납치문제담당장관’ 자리를 신설하는 등 납치문제 해결에 정치 생명을 거는 행보를 보였다. 

북일 납치 문제 입장 ‘평행선’, 관건은 ‘국내 여론’

2014년 5월 다시 만난 북일은 스톡홀롬 합의를 통해 일본인 납치문제 재조사와 일본의 대북 독자제재 완화 등을 맞바꾸기로 의견 일치를 보기도 했다. 당시 일본은 공인한 자국민 납치 피해자 12명의 안부 정보를 포함한 납치 재조사 결과를 신속하게 통지하도록 요구했다. 하지만 북한은 '12명 중 8명은 사망했고 4명은 아예 입국하지 않았다'는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9월 6일 도쿄도청에서 상영된 영화 ‘메구미-찢어진 가족의 30년’ 무료 상영회 모습. 영화가 상영되자 객석 이곳저곳에서 눈물을 훔치는 소리가 들렸다. 정부 납치문제대책본부는 납치문제의 여론 환기를 위해 전국에서 영화 상영회를 열고 있다.  (사진=최지희기자 ⓒ프레스맨)

세번 째 총재 임기를 맞이한 아베 총리는 여전히 ‘납치 피해자들 전원’이 북한에 살아있는 것을 전제로 이들을 무사히 일본으로 데려오는 것을 공식적인 목표로 하고 있다. 반면 북한은 여전히 “납치 문제는 이미 해결된 문제”라는 입장에서 물러서지 않고 있다. 

한편 이러한 와중에도 북일 간 물밑 접촉은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워싱턴 포스트는 지난 7월 일본과 북한이 베트남에서 비밀 회담을 가졌다고 보도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한 일본 정부 관계자는 “만난 것으로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납치 문제의 진전을 보기위해서는 이처럼 크게 벌어진 양측의 입장이 좁혀지지 않으면 힘들다. 이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작업은 우선 일본 국내 여론을 납득시키는 일일 것이다. 남은 3년의 임기 내에 스스로 공언한 정치적 사명인 납치 문제를 해결하고 북한과 관계 개선의 길을 열 수 있을지 아베 총리의 행보에 시선이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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