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 수해지 구라시키시 마비 마을, 사망자만 51명…자원봉사자 몰려
폭우 이어 폭염까지 더디기만 한 복구현장···주민들 마음의 상처 회복 절실

오카야마현 구라시키시 마비마을. 멀리 수해 피해로 쓸 수 없게 된 물건들이 쌓여 있는 것이 보인다. (사진=최지희기자)<br>
오카야마현 구라시키시 마비마을. 멀리 수해 피해로 쓸 수 없게 된 물건들이 쌓여 있는 것이 보인다. (사진=최지희기자)

[프레스맨] 일본 서부 오카야마(岡山)현 구라시키(倉敷) 시. 비가 적고 일조량이 풍부하기로 유명해 ‘하레노구니(맑은 날이 많은 지역)’로 불리던 곳이 하루아침에 호우로 인한 최대 침수 지역으로 변했다. 서일본 호우로 폭우특별경계가 내려진 지 한달을 맞은 6일, 구라시키에서도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은 마비(真備) 지역을 찾았다. 

도쿄에서 신칸센으로 약 3시간 반을 달려 도착한 신구라시키(新倉敷) 역. ‘서일본 일부 지역 39.9도’를 알리는 뉴스 속보에 폭염 속 지원 활동이 되리란 예상은 진작에 했다. 그럼에도 역을 나와 직접 맞닥뜨린 구라시키의 햇볕은 두려움을 느끼게 할 만큼 강렬했다.

7월 6일 내린 집중호우로 범람한 다카마가와. 강의 범람으로 피해가 커져 이 지역에서만 51명이 숨졌다. (사진=최지희기자)<br>
6일 오전 9시 반, 최고 기온이 39도에 육박하는 날임에도 수백명의 봉사자들이 구라시키에 몰렸다. (사진=최지희기자)

구라시키 지역의 봉사활동 전체를 관할하는 재해자원봉사센터에는 월요일 아침임에도 200명이 넘는 자원봉사자가 모여 있었다. 봉사자들은 열사병 대책과 활동 유의 사항 등을 삼십 여 분에 걸쳐 교육 받은 후 셔틀 버스를 타고 이내 각 피해지역으로 흩어졌다.

배정된 곳은 이번 폭우로 가장 큰 침수 피해를 입은 마비(真備) 지역이었다. 창을 통해 눈에 들어 온 풍경은 이동하는 버스안을 내내 숙연하게 만들었다. 폭우 직후 무더위가 찾아온 마비 지역의 밭은 농작물이 쓸려 내려가 바닥을 보인 채 말라 있었다. 주택의 창문은 모두 깨어져 텅 빈 집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추억이 깃들었을 생활용품과 가전들이 집 내장재와 한데 섞여 길가 곳곳에 쌓여 있었다. 

7월 6일 내린 집중호우로 범람한 다카마가와. 강의 범람으로 피해가 커져 이 지역에서만 51명이 숨졌다. (사진=최지희기자)<br>
7월 6일 내린 집중호우로 범람한 다카마가와. 강의 범람으로 피해가 커져 이 지역에서만 51명이 숨졌다. (사진=최지희기자)

지난 달 6일 구라시키에 쉬지 않고 뿌려진 비는 오후 9시부터 한 시간 가량 가장 집중적으로 쏟아졌다. 마비 마을을 관통하는 강인 오다가와(小田川)와 지류인 다카마가와(高馬川)가 합쳐지는 곳에 위치한 ‘마비 지부’로 향하며 한 달 전 오늘을 생각했다. 그날 밤, 마비 마을 전체에 피난지시가 내려지고 자위대에 긴급지원을 요청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상태였다. 대규모 침수가 시작되어 물이 어른 허리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 소리에 묻혀 대피 안내 방송이 들리지도 않았다”

마비 지부에서 약 100미터 떨어진 곳에서 문구점을 경영하던 오타 씨는 참혹했던 기억을 다시금 끄집어냈다. 피난 안내 방송이 제대로 들리기 시작한 무렵에는 이미 물이 가게 안까지 흘러 들어온 뒤였다. 오타 씨는 “갑작스레 불어나는 물에 무서워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윽고 지금 당장 피난하라는 지시가 반복적으로 내려졌지만 오타 씨를 비롯한 주변 이웃들 모두 선뜻 집안을 빠져나올 수 없었다. 오타 씨의 가게만 해도 2층짜리 건물이었기에 윗층으로 대피해 있는 사이 비가 그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오산이었다. 비는 지붕을 모두 삼켜버릴 만큼 몰아 내린 뒤에서야 그쳤다. 가족은 세간살이 하나 챙기지 못하고 깜깜한 새벽에 물살을 헤쳐 집을 빠져나왔다. 

“새벽이라 제대로 대피를 못한 건지…” 

본인들 보다 더 큰 피해를 입은 이웃의 소식을 전하는 오타 씨의 목소리는 희미하게 떨렸다. 오타 씨 가족의 경우 그나마 목숨은 건질 수 있었지만, 옆 단지의 어르신 두 명은 끝끝내 빠져나오지 못했다. 구라시키시 마비 마을에서는 폭우로 숨진 사람만 51명으로, 이들 가운데 36명이 65세 이상의 고령자였다. 

이날은 서일본 집중호우 피해 한달을 맞아 아베 총리가 히로시마를 시찰한 뉴스가 지역 신문 1면을 장식했다. 마비 지역의 한 주민은 “복구, 복구 하는데 도대체 뭘 복구한다는 말이냐”며 탄식했다. 반세기 넘게 일궈온 터전이 수 년 안에 복구될 수 있냐며 연신 반문했다. 주민들의 깊어진 마음의 상처가 아물기까지는 수십 년도 모자랄 듯 보였다. 

복구 작업을 돕기 위해 이동하는 봉사자들 (사진=최지희기자)<br>
복구 작업을 돕기 위해 이동하는 봉사자들 (사진=최지희기자)
거리 곳곳에 침수 주택에서 뜯어낸 나무 판자 벽 등이 쌓여있다. (사진=최지희기자)

오타 씨의 가게와 2층 집안 내부는 강물과 함께 떠내려온 진흙들로 곳곳이 말라붙어 있었다. 걸레로 힘주어 문질러도 좀처럼 씻겨지지 않았다. 유일하게 건진 물건이라며 보여준 나무 테이블 역시 딱딱하게 굳은 진흙으로 뒤덮여 있었다. 

닦아내도 닦아내도 금세 희뿌옇게 변해 더이상 닦을 힘이 없다고 말하는 오타 씨의 눈가가 또다시 붉어졌다. 철제로 된 건물 뼈대 이외에 나무로 된 모든 것은 침수로 사용할 수 없어 죄다 뜯어낼 수 밖에 없었다. 작업이 한창인 실내는 엄청난 먼지들로 마스크와 고글 없이는 오래 머물기 조차 힘든 상황이었다.  

일손을 돕는 작업은 20분간 실시 후 10분간 쉬는 식으로 진행됐다. 열사병에 걸리는 봉사자들이 속출할 만큼 혹독한 더위 속의 작업이었다. 첫 20분간 작업만으로도 땀으로 샤워를 한 듯 온몸이 흠뻑 젖었다. 

모든 것을 잃었지만, 반면 가족과 함께 목숨을 건져 모든 것을 얻었다는 오타 씨는 “미안하고 고맙다”며 연신 인사했다. 오타 씨의 꿈은 작은 다가시야(옛날 과자점)를 새롭게 운영하는 것이다. 언젠가는 마을이 예전 모습으로 돌아와 아이들이 100엔 200엔을 들고 웃으며 찾아와주는 소박한 가게를 운영할 수 있으면 그걸로 만족한다고 했다. 

오전 10시부터 시작된 이날 작업은 봉사자들의 안전을 위해 오후 3시에 끝이 났다. 5시간 동안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곤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의 진흙을 닦아내는 정도였다. 가뜩이나 갈 길이 먼 복구 작업은 폭우 직후 찾아온 살인적인 무더위에 더디기만 했다. 

경찰청에 따르면 서일본 집중 호우로 인한 사망자는 4일 오후 5시를 기점으로 총 255명에 이른다. 소방청의 집계 결과 주택피해는 전파 5236동, 반파 5790동, 일부 파손 3024동이었다. 피난권고와 지시는 총 6만명에게 내려졌으며, 3600명 이상이 피난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돌아오는 발걸음을 무겁게 만든 것은 무더위와 피로 탓만은 아니었다. 수십년간 살아온 땅에서 소중한 것들과 이별한 이들의 표정이 머리에 묵직하게 남았기 때문이다. 침수 주택의 복구와 함께 이들의 마음을 할퀸 상처를 복구하는 작업은 더욱 급하고도 절실해 보였다.    

저작권자 © 프레스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