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직장 여성 72% 성희롱·상사갑질 경험
성차별에 대한 '무감각·무관심' 풍조 만연

이미지=케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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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의 유명 종합상사에 근무하는 여성 A씨(29세). 그녀는 최근 회식자리에서 상사로부터 무릎에 앉으라는 소리를 들었다. 싫었지만 거부하면 분위기를 깰까봐 하라는대로 할 수 밖에 없었다.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같이 술자리에 있던 동료들 중 아무도 상사의 행동을 저지하지 않았다.

#2. 중견 의류제조업체에 다니는 B씨(45세)는 거래처와 회식으로 여성 접대부가 나오는 캬바쿠라(카바레식 클럽)에 자주 간다. 회피하고 싶지만, 여자라고 빼면 다음부터 회식에 안부르는 등 왕따를 당할 수도 있겠다는 걱정에서다. 성적 불쾌감보다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회사로부터 받을지도 모르는 불이익이 더 우려스럽다.

일본에서 고위 공직자의 성희롱 파문이 잇따라 발생하고 있는 가운데 일본 직장 여성의 72%가 직장 내에서 따돌림이나 괴롭힘, 성희롱을 당한 경험이 있다는 조사결과가 나와 충격을 주고 있다.

일본의 종합 인재컨설팅 회사 엔·재팬(エン·ジャパン)이 직장 여성을 대상으로 실시한 ‘직장내 괴롭힘 실태’조사에 따르면 상사의 부하 괴롭힘을 뜻하는 파워하라(Power + harassment)를 당한적이 있다는 응답이 76%로 가장 많았고, 이어서 직장내 성희롱인 세쿠하라(Sexual + harassment)가 44%로 2위를 차지했다.

연령별로 보면, 파워하라라고 답한 연령층은 40대 여성 81%, 30대 여성 71%로 30-40대에서 압도적으로 많았고, 성희롱은 20대 여성 57%, 30대 여성51%의 순으로 비교적 젊은 연령층에서의 응답이 높았다. 

이와 같은 연령별 차이는, 커리어상 간부 후보생으로서 경쟁이 치열한 시기인 40대의 경우, 성희롱과 같은 1차원적 괴롭힘보다는 업무분담이나 조직문화에서 오는 차별과 불이익에 더 민감한 것으로 해석된다. 파워하라에 대한 구체적인 에피소드로서는 ‘다른 사원의 실수를 자신에게 덮어씌우거나’, ‘싫으면 관둬라’라는 등의 망언,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질책’하고, ‘업무를 맡기지 않고 방치하는’ 경우 등 다양했다. 

반면, 남성중심적인 조직문화 속에서 직급마저 낮아 싫은 소리를 내기 어려운, 즉 사내 권력구조의 최하층이라고 할 수 있는 20대 여성의 경우는 성희롱 피해에 더 노출되어 있었다. 성희롱에 관한 에피소드로는 ‘회식자리에서 이성교제에 대한 화제나 야한 농담’을 건네거나, ‘회식 때 상사 옆에 않도록 강제적으로 자리를 지정당하고, 술이 취하면 은근슬쩍 손을 만진다’는 등 술자리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사례가 많았다. 오피스 내에서는 ‘손금을 봐주겠다’라던지, ‘어깨를 주물러 주겠다’라고 하는 등의 핑계로 신체접촉을 시도하려고 한다는 유형도 있었다.

조사 결과에서 보듯 직장내 성희롱이나 상사갑질이 만연해 있는 상황에서도 이를 해소하고자 하는 일본 여성들의 목소리는 크지 않다. 올 초 세계적으로 ‘#Me too(미투)’운동이 확산되며, 한국에서도 그 파급이 예술계를 넘어 정계에까지 미칠 정도로 그동안 성희롱, 성폭력 뿐만 아니라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억압되어있던 전반적인 여성차별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나오고 있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일본에서도 '미투' 운동의 기폭제가 될만한 사건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굵직굵직한 사건 중 가장 최근인 올해 4월엔 후쿠다 준이치(福田 淳一) 재무성 사무차관이 TV아사히 여성 기자와 취재를 위한 식사 자리에서 ‘키스해도 되냐’, ‘가슴 만져도 되냐’라는 등의 충격적인 발언을 했던 것이 주간지를 통해 공개되며 파문이 일었다. 더욱이 아소 다로(麻生 太郎)재무상이 후쿠다 사무차관을 두둔하는 취지의 발언을 하며 사태에 불이 붙어 일본에서도 '미투' 운동이 확산될 기미를 보였다. 이를 지켜보던 많은 한국의 언론들도 이정도까지 사건이 터졌으면 이번에야말로 일본에서도 '미투' 열풍이 불기 시작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3개월이 지난 현재, 피해 여기자는 후쿠다 본인의 사과도 받지 못한채 사건은 어느새 잠잠해졌고, 책임론을 들어 퇴진까지 요구받았던 아소 재무상은 여전히 건재하다. 오히려 당시 비난을 한몸에 받던 아베 정권의 지지율은 놀랍게도 상승하고 있다. 미디어에  가끔 등장했던 '미투'라는 단어조차 지금은 전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한국에서라면 상당한 논란거리가 될만한 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 '미투' 운동이 확산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번째 이유는 성희롱에 대한 일본 사회의 ‘무감각’이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녹취록이 공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소 재무상의 ‘(후쿠다가) 함정에 빠진 것’ 이라는 가해자를 두둔하는 발언이나,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여기자는 이름을 밝히고 나와라’라고 한 발언, 시모무라 하쿠분(下村博文) 전 문부성대신이 여성기자가 녹취한 것을 두고 ‘범죄’라 표현한 것, ‘#Me too’ 피켓을 들고 항의하는 야당 여성의원들에게 ‘적어도 나한테 있어서는, 성희롱과 거리가 먼 분들’이라고 발언한 나가오 다카시(長尾敬) 자민당 의원의 발언까지. 

여성기자가 후쿠다씨와의 대화를 녹취해 제 3자(주간지 ‘신조’)에게 넘긴 것이 부적절한 것은 사실이다(추후 TV아사히는 보도윤리의 관점에서 해당 여기자에게 주의를 주었고, 본인 또한 그 사실을 인정 및 반성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를 인정하더라도, 누구보다 도덕성이 요구되는 관료와 정치가가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며, 피해자에게 2차 피해를 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발언을 스스럼없이 하면서, 그것이 피해자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성희롱에 대해 무감각한 사회 분위기는 실로 기묘하다고 할 수 있다.

두번째 이유는 ‘무관심’이다. 즉 이렇게 문제가 불거지더라도 그를 받아줄 여론이 없거나 혹은 적다는 것이다. 일본의 주간경제지 ‘다이아몬드’에  따르면 평범한 남성들은 ‘성희롱은 뉴스에나 나오는 문제로, 나 자신은 해본 적도 생각해 본 적도, 주위에서 본 적도 없는 먼나라 이야기’로, ‘관심없다’, ‘특별히 의견이 없다’, 또는 ‘시대가 바뀐 탓이다’ 정도로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 사회적 문제로서 진지하게 이를 받아들이는 경우가 적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성이 위축될 수 밖에 없는 사회적 분위기 탓에 여성들의 대처가 '소극적'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자신이 피해를 입더라도 이를 밝혀서 문제로 삼기 보다는 조용히 해결하거나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앞서 언급한 엔재팬의 조사에서, 직장에서 괴롭힘을 당했을 경우 누구에게 상담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1위가 동료(39%), 2위 상사(34%), 3위 친구(32%)인 반면, 인사부에 상담한다는 대답은 5%에 그쳐, 문제 해결이나 고민상담을 회사라는 조직이 아닌 개인적인 인맥에 의존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성폭행이나 성희롱 문제, 성차별에 대한 무관심과 무감각, 가해자보다 피해자가 비난 받는 사회분위기가 바뀌지 않는 한, 일본에서 미투 운동의 확산은 요원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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