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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납치문제, 어떻게 북일 최대 현안 됐나
일본인 납치문제, 어떻게 북일 최대 현안 됐나
아베 총리, 납치문제 해결에 정치적 생명 걸며 입지 다져와
  • 도쿄=최지희 기자
  • 승인 2018.03.23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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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는 1970년대 들어 불특정 일본인이 이유없이 사라지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하지만 실체가 밝혀지지 않아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나진 않았다. 그러다 1980년 1월 7일 산케이신문이 처음으로 실종자들이 북한에 납치되었을 가능성을 조간신문 1면 머릿기사로 보도하게 된다. 그러나 이 때 역시 북한의 관여가 의심되면서도 진상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며, 당시의 일본 사회는 진보・보수를 떠나 북한과의 국교정상화가 동아시아 평화와 안정에 기여한다는 공통된 인식을 갖던 시기였기에 보도는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1980년 1월 7일 산케이신문은 불특정 일본인 남녀 세 쌍의 실종과 북한과의 연관성을 의심하는 기사를 특종 보도했다. (산케이신문 마이크로필름, 일본도립중앙도서관)

납치문제가 보다 세간의 관심을 받게 된 계기는 1987년 11월 29일 발생한 KAL기 폭파 사고였다. 붙잡힌 북한 공작원 중 한 명인 김현희의 진술로 자신의 일본어 교육요원이었던 ‘이은혜’라는 여성이 납치된 일본인일 가능성이 부상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도 실종 일본인과의 연관성을 명확히 밝혀내지 못한 채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대중의 관심은 멀어져갔다.

그 후 1997년 2월 3일, 산케이신문이 또다시 납치문제로 특종 보도를 하게 된다. 처음으로 실종 여성의 실명(요코타 메구미, 横田めぐみ)을 보도하고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납치된 정황들을 제기하면서 납치문제가 여론에 각인되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는 산케이 뿐 아니라 다른 언론 역시 납치문제를 비중있게 다루면서, 납치 피해를 주장하는 가족들이 주축이 된 ‘가족회’, 이를 지원하는 ‘구하는 회’ 등이 결성되는 등 본격적으로 해결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거세지게 된다. 

산케이신문은 1997년 2월 3일자 1면 보도를 통해 북한 공작원에 의해 실종된 일본 여성의 이름(요코다 메구미)을 공개했다. (산케이신문 마이크로필름, 일본도립중앙도서관)

2002년 9월 17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小泉純一郎) 총리의 방북으로 열린 북일정상회담은 이전까지 납치문제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던 일본 국민들에게도 충격을 안겨준 역사적 사건이었다. ‘가족회’를 비롯한 단체 및 정치 세력은 북일정상회담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납치 피해자 구출을 정책의 1순위로 요구했으며, 미디어 역시 연일 경쟁적으로 관련 뉴스를 보도하면서 납치 문제가 정점으로 치닫게 된다. 특히 같은 해 10월 15일, 납치 피해자 가운데 5명이 귀국하면서 와이드쇼를 비롯한 일본 언론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과열되고 자극적인 보도를 이어나갔다. 그 여파로 일본 사회에서 납치문제는 터부시되어 어느 누구도 이견을 제시할 수 없는 분위기가 되었다.

여론의 관심은 시간이 흐를수록 북일정상회담을 계기로 합의된 평양 선언의 의의를 평가하기 보다는 납치문제에 치중해 갔다. 평양선언에는 국교정상화 후 쌍방이 적절하다고 간주하는 기간에 걸쳐 일본이 무상자금협력, 저리(低利) 장기차관 제공 및 국제기구를 통한 인도지원 등의 경제협력을 한다는 내용들이 담겨져 있었다. 또한 동북아시아 평화와 안정에 기여하는 북일 관계 정상화의 밑그림을 포함하는 등 합의는 가히 획기적이라 평할 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경한 여론에 떠밀린 일본 정부는 북일 관계에 장애가 되더라도 납치 문제를 최우선시하는 입장을 점차 굳혀가게 된다. 

한편 이러한 과정에서 납치문제 해결을 강력히 촉구하는 세력은 문제 해결을 위한 정치적 권력을 부여받게 되었는데, 북일정상회담 후 정계에서는 납치문제에 있어 강경책을 고수해 온 아베신조(安倍晋三) 당시 관방부장관의 인기가 급상승하게 된다. 아베가 고이즈미의 후계자로 자리 잡게 된 데는 납치문제를 부각시키면서 반북한 분위기를 주도해온 이력이 크게 작용했다. 이후 2006년 총리직에 오른 아베는 내각 출범과 동시에 ‘납치문제 대책본부’를 설치하고 스스로 본부장에 취임했으며, ‘납치문제담당장관’ 자리를 신설하는 등 납치문제 해결에 정치 생명을 거는 행보를 보였다.

2002년 10월 15일 납치 피해자 가운데 5명이 일본으로 일시 귀국했다. 산케이신문을 비롯한 모든 신문은 호외를 발행했고, 방송은 귀국자의 일거수일투족을 연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산케이신문 마이크로필름, 일본도립중앙도서관)

그 후 세월이 흘러 2014년 5월 다시 만난 북일은 스톡홀롬 합의를 통해 일본인 납치문제 재조사와 일본의 대북 독자제재 완화 등을 맞바꾸기로 의견 일치를 보기도 했다. 당시 일본은 공인한 자국민 납치 피해자 12명의 안부 정보를 포함한 납치 재조사 결과를 신속하게 통지하도록 요구했다. 하지만 북한은 '12명 중 8명은 사망했고 4명은 아예 입국하지 않았다'는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일본 정부는 납치 피해자들 전원이 북한에 살아있는 것을 전제로 이들을 무사히 일본으로 데려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처럼 양측의 입장은 팽팽한 평행선을 달린 채 지금까지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 북일 관계는 정상화 노력의 좌절을 맛보기도 했으며, 납치 문제 해결을 위해 방안을 합의했다가도 입장차로 결렬되는 등의 반목을 거듭해왔다. 이러한 가운데 이번 남북, 북미 연쇄 정상회담에 이어 수 십 년간 엉켜 온 실타래를 풀기 위해 북일이 마주 앉을 수 있을지, 예측하기 힘든 변곡점을 향해 시간은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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