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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인가 선택인가...정의신 作 '적도 아래의 맥베스'
운명인가 선택인가...정의신 作 '적도 아래의 맥베스'
‘혐한’이 오락인 시대, BC급 전범의 형무소 생활 그려
  • 도쿄=김민정 기자
  • 승인 2018.03.17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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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극이 발표될 때마다 티켓이 불티나게 팔리는 작가, 정의신. 1957년 히메지(姫路)에서 태어나 한때 윤동주가 다녔던 교토의 도시샤(同志社) 대학교에 입학한 그는, 도중에 대학을 중퇴하고 요코하마 방송영화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영화회사 쇼치쿠(松竹)에서 미술조수로 일하다가 1987년 극단 ‘신주쿠 양산박(新宿梁山泊)’을 설립하고 극작가로 취임했다. 1994년 ‘더 테라야마’로 기시다(岸田國士) 구니오 희극상을 받았고, 1995년에 양산박을 탈퇴 후, 영화계에서 활약, 최근에는 다시 연극계에서 큰 주목을 끌고 있다. ‘용길이네 곱창집’ ‘파마가게 스미레’ ‘예를 들어 들에 피는 꽃처럼’의 재일동포 근대사 3부작을 잇는, 새로운 작품이 3월 6일부터 3월 25일까지 도쿄에서 상연된다.

현재 도쿄 신국립극장 소극장에서 상연중인 연극 ‘적도 아래의 맥베스’는 싱가폴 창기 형무소에 포로 학대 혐의로 수용된 BC급 전범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지난 14일, 정의신 연극답게 객석은 만석이었다. 무대엔 상이 하나 놓여있다. 배우들은 상을 둘러싸고 이야기를 나누고 주린 배를 비스켓 2장으로 채운다. 벽이 온통 회색으로 칠해져 비장감이 느껴지는 무대다.

구로다 할아버지와 사형을 앞둔 박남성. 박남성 역의 이케우치 히로유키(池内博之)는 조선인 BC급 전범 역을 위해 13킬로 감량했다. 구로다 할아버지 역의 히라타 미츠루(平田満)는 유명한 베테랑 배우다. <사진출처=출처:신국립극장 홈페이지>

주인공 박남성(이케우치 히로유키池内博之)은 연극배우가 되는 것이 꿈이다. 전범으로 수용되기 전, 딱 한 번 무대에 오른 경험이 있다. 바로 ‘맥베스’에 출연한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그 ‘맥베스’ 대본을 손에 쥐고 놓지 않는다. 홀어머니를 두고 온 이문평(오노우에 히로유키尾上博之)은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매일 눈물을 흘린다. 조선인들을 멸시하고 포로를 학대하게 했던 야마가타 중위(아사노 마사히로浅野雅博)도 전범으로 잡혀있다. 그는 과오를 전혀 뉘우치지 않는 인물이다. 왜 조선인에게 포로를 학대하라고 시켰냐고 물어도 입도 벙끗하지 않는다. 그는 중위로서 자신의 인생에 부끄러움이 없다고 여긴다. 자신이 선택해온 길을 믿는다. 일본이 식민지에 문명을 가져왔는 한 줄기 빛을 말이다.

한편 구로다 할아버지(히라타 미츠루平田満)는 그에게 “아직도 그런 거짓말을 믿냐?”고 반론한다. 그는 일본인으로서 자신들이 했던 범죄를 부끄러워하며, 죄송하다고 눈물을 흘리는 인물이다.

전쟁의 과오를 뉘우치지 않는 일본인 중위 야마가타(왼쪽)와 그를 따르는 고니시. 야마가타 중위는 일본이 식민지에게 문명을 가져다 주었다고 믿는다. <사진출처=출처:신국립극장 홈페이지>

박남성은 고민한다. 일본인들을 용서해야할지 말아야 할지. 그 전에 자신이 전범이 된 것은 일본인의 탓인지 아니면 자신의 탓인지를 곰곰히 생각한다. 일본이 또는 운명이 그를 전범으로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박남성은,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 아버지에게 반항하기 위해 연극에 발을 디디고, 결국 포로 관리수로 살게 된 것을 자기 자신의 선택이라고 말한다. 박남성은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선택했다고 생각하고 싶다.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식민지로 삼고, 박남성은 군인이 되거나 포로 관리수가 되거나 어차피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선택지따위 없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남성은 자신의 선택하에 전범이 되었다고 말한다. 적어도 자신의 삶이 자신의 선택으로 이뤄졌다고 생각했을 때, 그는 일본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맥베스가 왕을 죽인 것은 운명이었을까, 선택이었을까.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단 한들, 운명에 지기 보다 운명에 맞서 선택했다고 받아들이는 것이 박남성 식의 인생살이인 것이다.

무대 정중앙에 교수대를 놓았는데, 실제로 창기 형무소에서는 사형당하는 사람을 볼 수 있도록 중간 지점에 교수대를 설치했다고 한다. <사진출처=출처:신국립극장 홈페이지>

결국 포로를 학대한 BC급 전범들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간다. 처음 무대에 올랐던 6명의 전범 중 마지막 무대에 남은 사람은 단 2명이다. 정의신은 무대에서 한 명씩 사라지게 함으로써 죽음을 표현한다. 더불어 정의신은 전범들이 편지를 쓰는 일상을 그린다. 편지를 통해 그들이 겪은 어처구니 없던 현실과 슬픔과 아픔을 한 자씩 남기도록 한다. 20년 후, 50년 후에 누군가 그들의 이야기를 읽고 같이 서러워해줄 사람이 있기를 바라면서.

정의신의 재일동포근대사 시리즈들은 하나같이 ‘서술’에 주목한다. 당시의 정황을 글로 써서 남기면, 100년 후에 누군가가 그 글을 읽고 감동을 하고, 또 억울함을 위로해줄 것이라고. 그것이 바로 정의신이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진실을 기록하는 자만이, 승리를 거둘 수 있다.

사형 전날의 마지막 만찬. 왜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이 시키는대로 하다가 전범이 되었을까. 박남성은 죽음을 앞두고 일본이 시켜서가 아니라, 자신이 선택했다고 믿고 싶다. 그래야 일본에게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사진출처=출처:신국립극장 홈페이지>

‘적도 아래의 맥베스’는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연극이다. 어느날 식민지가 된 조선에서 어쩔 수 없이 먼 동남아로까지 끌려온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에게 핍박받으며 포로를 학대한다. 그리고 포로를 학대한 죄로 사형을 선고 받는다. 학대 혐의로 기소된 BC급 전범 가운데에는 148명이 조선인이었다. 이들 중 23명이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고, 125명이 유•무기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이 연극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사형 전날밤의 만찬이다. 3명의 조선인 전범들은 반찬에서 고추를 발견하고 기쁨에 눈물을 흘린다. 겨우 잘게 잘린 고추 몇 점이 그들의 외로움과 서러움, 억울함을 달래준다. 소수의 목소리에 계속 귀를 기울이는 것, 정의신은 그것이 극작가로서 자신이 역할이라고 말한다.

이번 아카데미상 감독상은 ‘셰이프 오브 워터:사랑의 모양’이 수상했다. 반면 ‘위대한 쇼맨’은 같은 약자를 그리면서도 아카데미상에서 보기 좋게 물을 먹었다. 약자의 소리를 어떤 식으로 세상 밖으로 끌어올리느냐는 작품의 완성도를 좌우한다. 약자의 소리를 무시한 채 음악과 댄스로 점칠하느냐 약자의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세심하게 받아들이고 풀어가느냐는 엔터테이먼트의 중요한 요소다.

2010년대에 들어서 ‘혐한’이 오락으로 소비되는 가운데, 재일동포를 소재로 한 정의신의 무게있는 작품이 인기를 끄는 것은, 그가 작은 목소리에 끊임없이 귀를 기울이고, 조심스럽게 풀어내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올 여름 개봉예정인 ‘용길이네 곱창집’ 영화에도 기대가 실린다.

<용어설명> BC급 전범(BC級戦犯)은 연합국에 의해 선포된 국제 군사재판소 조례 및 극동 국제 군사재판 조례의 전쟁 범죄 유형B 항 ‘보통의 전쟁 범죄’ 또는 C항 ‘반인륜 범죄’에 해당하는 전쟁 범죄 또는 전쟁 범죄가 되는 죄목을 추궁 받은 개인의 총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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