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드 ‘마더’ 작가의 최신 드라마 ‘아노네’

한국 최대 명절인 ‘설’이다. 어릴 적 설이면 할아버지 할머니 댁으로 찾아갔다. 일년에 한 번 보는 친척들로 가득한 집에서, 왜인지 모를 소외감을 느꼈다. 일년에 한 번 보는 어르신들은 키가 얼마나 컸는지, 얼굴은 더 예뻐졌는지 살은 쪘는지 성적은 어떤지 사소한 것을 끊임없이 확인하고자 했다. 엄마는 음식을 했고 아빠는 화투를 치고 나와 동생은 일년에 한 번 보는 친척들 사이에서 윷놀이를 했다. 평범했지만 빨리 집으로 가고만 싶었다. 한복이나 설빔을 입고 세배를 드리는 일은 영 불편했다. 소심하고 내향적인 성격이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어르신들은 여럿 되었고, 세뱃돈을 받아도 그 가치를 알 수 없는 나이였다. 차라리 가족여행을 갔으면 어땠을까. “언제 집에 갈 거야?”를 엄마에게 아빠에게 번갈아 물으며 설을 보냈다. 일년에 한 번 모인 가족들의 들쑥날쑥한 하모니는 소음으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가족이란 무엇인가. 일본의 시나리오 작가 중 ‘가족’의 의미를 끊임없이 묻는 작가가 있다. 현재 한국에서 한국판으로 방영중인 ‘마더’의 사카모토 유지(坂元裕二)다.

드라마 '마더'에서 딸을 연기한 아시다 마나와 선생님 역의 마츠유키 야스코. 연애물의 여주인공으로만 등장하던 마츠유키 야스코가 엄마로 연기의 폭을 넓혔다. <사진출처=드라마 마더 홈페이지>

‘마더’는 학대 받는 아이를 데리고 도망친 선생님의 이야기다. 일본에선 2010년 4월부터 6월까지 방영되었다. 과연 드라마 ‘마더’에서 진정한 엄마는 누구일까? 애인에게 성적 희롱을 당하는 어린 딸을 못 본 척하다 못해, 쓰레기 통에 버린 엄마를 과연 ‘마더’라고 더 정확하게 올바른 양육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 혈연관계는 없지만 버려진 아이를 데리고 홋카이도에서 도쿄로 도망친 교사는 어떤가. 끝까지 아이를 지키려 했던 교사야말로 ‘마더’가 아닐까.

1967년생인 사카모토 유지는 1987년, 19세의 나이로 드라마 작가 등용문인 후지 티비의 ‘영 시나리오 대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등장했다. 그 시절 가장 인기 있던 사이몬 후미 원작의 만화를 맡아 트렌디 드라마로 화려하게 재현해냈다. 사카모토 유지를 인기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작품이 ‘도쿄 러브스토리(1991년 방영)’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일본으로 건너온 리카 역을 스즈키 호나미가 맡았고, 첫사랑에 실패한 칸지 역을 오다 유지가 맡았다. 당대 최대의 청춘스타들이 참여한 이 드라마는 최고 시청율 32%를 올린 효자 드라마였다. 그렇게 스타 작가가 된 사카모토 유지는 그후, 연애물뿐만 아니라, 청춘물, 가족물 등 다양한 스토리를 내놓았고 모든 작품이 화제가 되었다.
 
그런 그가 요 몇 년 꾸준히 그리고 있는 테마는 ‘가족’이다. 도대체 가족이란 무엇일까? 그는 혈연관계의 해체를 선언한다. 드라마 ‘마더’가 바로 그 첫번째 도전이었다. 2010년 ‘마더’가 방영되던 동시기에, 사카모토 유지는 NHK의 토요드라마도 ‘체이스-국세조사관’(이하, 체이스)의 각본을 담당한다. 

‘체이스’에서 냉혈한 탈세 컨설턴트 역을 맡은 이우라 아라타. 90년대 패션모델로 인기를 끌던 그는 2002년 영화 ‘핑퐁’으로 데뷔 후 꾸준히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사진출처=드라마 체이스 홈페이지>

‘체이스’는 탈세하는 자와 그를 쫓는 국세청 담당자의 목숨을 건 싸움을 그린 심각한 드라마다. 세금 컨설턴트 무라구모는, 말이 컨설턴트지 일본 부자들의 돈을 세금이 적은 나라로 보내 탈세를 돕는 인물이다. 상속세가 없는 나라를 찾아가 아이를 낳아 상속시켜 탈세하는 법, 가짜 금궤를 가지고 나가서 진짜 금궤로 바꿔오는 법, 비행기를 구입해서 사고를 내는 것 등 탈세를 위한 다양한 수단을 동원해 무려 총 6천억엔의 탈세를 도운 인물이 무라구모다. 탈세를 위해서라면 타인의 목숨까지 담보로 삼는 냉혈한 무라구모는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무라구모의 친모는 애인과 돈을 위해 무라구모를 깔끔하게 버린다. 그것도 무라구모의 한 쪽 팔을 빼앗는 만행을 저지르고. 드라마 마지막 씬은 체포되기 직전에 수십억 엔이 든 금고의 비밀번호를 들고 친모를 찾아간다. 그러나 친모는 그에게 “당신이 누구인지 모른다.”고 잡아뗀다. 

사카모토 유지는 동시기에 두 드라마의 각본을 맡아 ‘모성’에 관해 이야기한다. 드라마 ‘마더’는 가짜 엄마에게 구원을 받은 아이의 이야기며, ‘체이스’는 친모에게 버려져 결코 구원받지 못한 아이의 말로를 그리고 있다. 사카모토 유지는 이 두 드라마를 통해 혈연관계가 가족의 기초가 아니라고 부정하고 또 부정한다. 더불어 아버지나 남편의 존재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거나, 있어도 문제 해결에 딱히 도움을 주지 못하는 존재로 표현된다.

‘마더’의 사카모토 유지의 최신작 ‘anone’. 현재 방영중 <이미지출처=드라마 anone 홈페이지>

그런 사카모토 유지가 이번 시즌에 또 한 번 ‘가족’을 테마로 한 드라마를 들고 나왔다. ‘아노네’는 부모에게 버려진 딸과 딸에게 버림받은 엄마의 이야기다.  인쇄회사의 안주인인 60대의 ‘아노네’는, 우연히 부모에게 버림받고 피씨방에서 사는 ‘하리카’를 만나게 된다. 아노네에겐 남편이 바람을 피워 낳아온 딸이 있다. 아노네가 열심히 키운 그 딸은 고교시절 ‘낳은’엄마를 만난 후, 가출을 한다. 자신이 믿어온 이가 친모가 아니었다는 상실감과 배신감 때문이다. 아네노는 집을 나간 딸 대신 우연히 알게 된 하리카를 먹이고 입히고 재운다. 아노네의 집에서 잠옷을 입고 이불에 누운 하리카. 잠옷을 입고 자는 것이 그녀의 소박한 꿈이 이뤄진 순간이다.

드라마 'anone'의 주인공 ‘하리카’역의 히로세 스즈, ‘아노네’역의 다나카 유코. 히로세는 ‘바닷마을 다이어리’로, 다나카는 ‘오싱’으로 우리에게도 알려진 배우다. <사진출처=드라마 anone 홈페이지>

하리카를 버린 ‘낳은’엄마와 하리카를 보살피는 ‘아노네’. 과연 누가 더 엄마라는 이름에 걸맞을까? 반면에 키운 엄마를 계속 부정하는 딸에게 과연 엄마란 무엇일까? 먹이고 입히고 재워줘도 딸의 가슴 한 켠에 서린 억울함을, 키운 엄마인 아노네는 부정하지 못한다. 아노네와 키운 딸보다 아노네와 하리카 쪽이 훨씬 더 이상적인 모녀 관계에 가깝다.

‘가족’은 무엇일까? 명절증후군이란 말이 있다고 한다. 명절기간에 스트레스를 받아 생기는 증상이다. 명절이 끝나면 이혼이 증가한다는 기사는 이제 식상할 정도다. 명절의 가족은 반갑기도 하지만, 스트레스를 주는 장본인이기도 하다. 과연 가족은 무엇일까? 혈연관계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 벽일까? 사카모토 유지는 내내 혈연관계에서 비롯한 가족을 부정한다. 비록 혈연관계는 아닐지언정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고 때로는 나란이 이를 닦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그는 가족으로 해석한다. 아니 꼭 가족일 필요는 없다. 당신을 인정하는 이들 틈에서 꽃피우라고 말한다. 2035년, 인구 절반이 미혼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일본에서 사카모토 유지의 메시지는 무척이나 현실적이다.

다함께 이를 닦는 순간의 평화로움을 사카모토 유지는 ‘가족’이라고 해석한다. <사진출처=드라마 anone 홈페이지>

‘이곳은 네가 있어야 하는 곳이다’ ‘너는 여기에 있어도 된다’고 인정하는 이를 가족으로 삼으라고 말한다. 끊임없는 질문으로 당신을 평가하려는 사람보다 ‘아노네(저기요), 오늘 이런 일이 있었어요.”라고 말하면 귀 기울여 줄 사람들 틈에서 살아가라고. 그래서 주인공의 이름은 ‘아노네’다. 말을 들어주는 사람, ‘마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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